남편이 죽자 음독한 권씨 정절 기려
남편이 죽자 음독한 권씨 정절 기려
  • 제미영 기자
  • 승인 2010.03.05 16: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열녀 최백복 처 안동권씨 정려

열녀 최백복 처 안동권씨 정려 (烈女 崔百福 妻 安東權氏 旌閭)는 조선후기의 정려로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 421-2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안동 권 씨가 죽음으로 지킨 정절을 널리 본받게 하기 위하여 건립됐으며 1997년 6월 5일 공주시 향교문화유적 유형 제4호로 지정됐다.

권 씨는 남편 최백복이 먼저 죽자 정성껏 장례를 치르고 집안일을 돌보면서 혹시 임신하였을까 기다리다가 태기(胎氣)가 없자 마침내 음독하여 남편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

1755년(영조 31) 죽음으로 지킨 정절을 널리 알려 본받게 하기 위하여 명정을 내렸고, 1803년(순조 3) 정려가 건립됐다.

안동 권 씨가 명정을 받은 과정은 충청남도 도정사료실에 소장된 4건의 천장에 의하여 일부 확인할 수 있다.

1753년 10월, 권 씨가 남편을 따라 죽은 직후에 두 건의 천장이 수령과 순찰사에게 각각 올려졌는데 공주 유학 윤심태 등 109명이 수령에게 올린 천장 공주 진사 김량균 등 100여명의 순찰사에게 올린 천장이 그것이다.

다만 윤심태 등이 올린 상소가 수령을 거치지 않고 관찰사에게 직접 올려졌기 때문에 관찰사가 수령에게 그 사실을 하문하였을 때 수령이 알지 못하는 일이라고 답하였다고 하는 후손들의 제보와 당시 유생들이 관찰사에게 먼저 글을 올리고 후에 수령에게 올렸다는 문중의 기록으로 미루어 1753년에 있었던 일련의 포장 활동은 천장을 올리는 절차상의 문제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못했을 가능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그 후 같은 해 11월에 부여 진사 민정수 외 175명의 충청도 유생들이 연명으로 순찰사에게 천장을 올렸고 1754년 윤 4월에는 공주 유생 박필명 외 53명이 수령에게 상소를 올리는 등의 과정을 거쳐 열녀 권 씨가 죽은 지 2년 후인 1755년에 명정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1850년(철종 1)과 1924년에 각각 중수되었고, 1940년에도 중수되면서 명정 현판도 지금의 것으로 바뀐 것이다.

정려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익공계 맞배지붕 건물이며, 8각 고주(高柱)에 뒷면은 벽으로 막혀 있고 나머지 3면은 중간 상단만 홍살로 처리되었다. 내부 중앙에 ‘열녀증통훈대부사복시정최백복처증숙인안동권씨지려영조을해명정(烈女贈通訓大夫司僕寺正崔百福妻贈淑人安東權氏之閭英祖乙亥命旌)’이라고 적힌 명정 현판이 걸려 있다.

열녀 안동 권 씨는 본관이 안동이며 동흥군(東興君) 상(常)의 5세손인 세헌(世憲)의 딸로 평소 말이 적고 행동거지가 정숙했으며 덕이 있었고 강화 최 씨 집안의 최백복에게 시집와서는 시부모 섬기기를 친부모 섬기는 것과 조금도 다름없이 정성을 다하였으므로 주위에서 효부라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강화최씨의 공주 입향은 최덕준(崔德俊)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공주에서 강화 최 씨가 처음 정착한 곳은 부전동(浮田洞)일대였기 때문에 공주의 강화 최 씨를 ‘뜸밭파’라고도 부른다.

최덕준은 죽산(竹山)에 거주하던 최형(崔亨)의 셋째 아들로 이미 부전동에 자리 잡고 있던 예안 김 씨 김석견(金石堅)의 사위가 되면서 이곳으로 이거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인연으로 강화 최 씨는 이거 직후 향촌사회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덕준의 아들인 금권(金權)과 금권의 장남인 선(選), 차남인 봉(逢)이 모두 공주향안에 이름이 오른다, 그 후 강화최씨 가문은 선(選)이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봉(逢)의 아들인 두에 의해 가문이 이어지게 되는데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향난원종공신(享難原從功臣)에 오르고 비인현감과 삼등현령을 지냈다.

두의 아들인 우량(宇量)은 부전동 동계의 계묘좌목에 등재돼 있다.

이처럼 강화최씨가 공주 부전동에 정착한 직후부터 공주향안이나 부전동 동계좌목에 이름이 기록된 점이나 우량의 6세손인 백복의 처 안동 권 씨가 죽은 후 2년 만에 명정을 받게 되는 점 등은 당시 강화최씨 ‘뜸밭파’가 공주지역에서 유력한 사족가문으로 성장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