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동설한에 자라 잡아 아버지께 끓여드려
엄동설한에 자라 잡아 아버지께 끓여드려
  • 제미영 기자
  • 승인 2010.02.05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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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양진언 정려(孝子 梁震彦 旌閭)

효자 양진언 정려(孝子 梁震彦 旌閭)는 효자 양진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것으로 공주시 신풍면 백룡리 21번지 오름실 마을 어귀에 위치해 있다.
양진언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매우 지극하였다. 16세 되던 해에 어머니가 병석에 눕게 되자 온갖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다.

19세 때에는 아버지마저 병이 들었는데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병이 낫지를 않았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아버지가 자라탕을 먹으면 병이 나을 것 같다고 하자 진언은 엄동설한임에도 불구하고 자라를 잡기 위하여 냇가(술밑 아래쪽에 있는 석순보)로 나갔다. 그러나 얼음이 두껍게 얼어 있어 도저히 자라를 잡을 방도가 없었으므로 물가에 엎드려 통곡하다가 결국엔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런데 비몽사몽간에 용왕이 나타나 말하기를 “너의 효성이 지극한지라 자라 한 마리를 보내줄 터이니 그것을 아버지께 드리도록 하여라”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눈 속에서 자라 한 마리가 등에 눈덩이를 지고 엉금엉금 기어 나오고 있었다.
진언은 크게 기뻐하며 그 자라를 잡아다가 탕을 끓여 아버지께 드리니 병세가 호전되었다고 한다.

효자 양진언 정려는 1892년 공주 유생 이복형(李福亨)과 향교재임 임진도(林鎭道)등이 양진언의 효행사실을 수령과 관찰사에게 상언하였고 관찰사가 다시 조정에 보고하고 같은 해 6월 예조판서 남정철과 좌부승지 정은조 등이 왕에게 건의해 양진언에게 조봉대두 동몽교관의 증직과 정려를 내렸다고 한다.
이때에 예조 입안과 함께 후손들에게는 세금과 잡역을 면제하는 안전을 내렸다고 하나 현재 예조입안은 전해지지 않는다.

양진언의 정려는 1892년 명정을 받아 그 당시에 건립이 이루어졌다고 전해진다. 처음 정려가 세워질 당시의 위치나 형태는 알 수 없지만 후손들의 제보에 의해 1932~1933년 어간에 양진언의 증손인 양주한(梁株漢, 1872~1947)이 자신의 집 앞에 3칸의 작은 건물을 짓고 그 가운데 칸에 명정현판을 가져다 걸어 두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양주한이 죽은 후 1956년 문중에서는 양진언의 묘소가 있는 공주시 신풍면 백룡리 산82번지로 정려를 옮겨 세웠으나 문중에서 정려가 너무 외진 곳에 있어 선조의 효행이 사장될 우려가 있다하여 1998년 지금의 백룡리 마을 어귀로 정려를 이건하였다.

양진언의 본관은 남원(南原)이자 자는 미중(美仲), 호는 성재(誠齋)이다. 남원 양 씨의 공주 입향조인 양계무(梁季武)의 8세손으로 1791년에 양정규(梁廷揆, 1761~1812)와 홍관휴(洪觀休)의 딸 남양홍 씨 사이에서 4형제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남원양씨가 백룡리에 정착하게 된 것은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양계무가 부여 임천에서 이곳으로 이거하면서 부터라고 전해지나 이를 확인할 문헌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양계무의 백룡리 입향과 관견하여 만석군 전설과 오름실, 부귀동, 술밑 등의 지명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마을의 지명유래와 관련하여 남원양씨의 입향조인 양계무(梁季武)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양계무는 집안이 가난하여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팔아서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어느 날 나무를 하러 산에 올라갔는데 막 점심을 먹으려고 하는 순간에 지나가던 노승이 배가 고파하는 것을 보고 측은하게 여겨 자신이 먹으려고 가져갔던 누룽지를 나누어주었다. 이에 노승이 매우 고마워하며 그 보답으로 명당을 하나 잡아 줄테니 당대에 만석꾼이 될 집 자리와 삼대에 걸쳐 정승이 나올 묘자리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였다.

계무는 당시 집안의 형편이 어려웠으므로 만석꾼이 될 집터를 잡아 줄 것을 부탁하였고 그 터에 집을 지은 그는 당대에 많은 재물을 모아 만석꾼이 되었다.
그리하여 양계무가 살았던 동네를 '부귀동'이라고도 불렸으며 이곳이 바로 현재의 백룡리 오름실 마을이다.

오름실이라는 마을 이름은 본래 오음실이라고 부르던 것이 변하여 오름실이 된 것인데 오음식(五陰室)은 글자 그대로 다섯 그루의 큰 느티나무 그늘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이 다섯 그루의 나무는 양계무가 심은 것이라고 하는데 현재 세그루가 지방보호수로 지정되어 남아 있다.

또, 만석꾼의 집에서는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매일같이 술을 빚었으므로 그 술찌개가 개천까지 떠내려 왔다하여 그 마을에 흐르는 냇물을 '술밑'이라 부른다고 한다.

현재 정려가 있는 신풍면 백룡리에는 남원 양 씨가 17대째 거주하고 있는데 총 70여 가구 중 20가구정도가 남원 양 씨다. 비록 지금은 남원 양 씨의 비중이 적지만 불과 몇 십년 전까지만 해도 이 마을은 남원 양 씨들의 대표적인 집성촌으로 다른 성씨들은 찾아보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정려는 정·측면 각 1칸으로 초익공 맞배지붕 양식이다. 팔각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사면은 홍살로 처리하였으며 정려 주변에는 낮은 담장을 둘렀다.
관련 유적으로는 백룡리 산 82번지에 양진언 묘소가 있고 묘소 왼쪽에는 1995년에 양진언의 현손인 시환(始換 )이 비문을 짓고 이공권(李公權)이 글씨를 쓴 양진언 효행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