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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육복수 시인
  • 승인 2010.01.11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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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갈 곳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길이 없음으로, 한 쪽 다리를 절룩거리며 등어리에 낡은 배낭을 불룩하게 둘러매고, 물기 빠진 눈알을 디룩거리며 간다.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칼바람이 어디랄 것 없이 날아와 쑤셔대는 이 엄동의 해거름 녘에 골목 휘돌아 저만치 갔다가 다시 이만치 왔다가 또다시 반복으로 왔다갔다를 하며 맴도는, 오늘은 어디서 무얼 얼마나 때웠을 것인지 어제의 때꺼리는 어떠했을 것인지 검다 못해 초록의 기가 얼굴 전체에 어른거리며,

그는, 오늘, 지금이, 추움으로, 지금 죽고 싶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죽어지지 않는 생의 고통을 어찌할 수 없어서, 이 길 없는 삶의 길을 어이어이 가고 있는 것이라, 소주 한 병 얻을 만큼의 동정을 사서 오늘밤은 미소지움 공사장 쯤에 몰래 들어가서 밤을 지세우려는 그리하여 내일 또다시 반복되는 정처 없는 길과 얻어먹음과 동냥된 소주와 짓다만 아파트의 잠자리의 삶은 이 곳 이 땅의 삶을 사는 정상적인 사람은 아니겠지,

그렇다고 그가 소위 말하는 또라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거든, 질펀하게 소주를 걸치고는 전화기를 빌려서는 아내와 아들에게 통화를 하는 것을 보면, 그 고약한 빚의 여한을 혼자서 떠안고 그는 지금 설한의 밤을 이렇게 보내고 있는 것이라, 소주 기운 떨어지는 새벽쯤이나 이 겨울 어느 모서리 즈음에서 그는 분명히 얼어 죽을 것이라,

빚더미와 눈물더미와 한 더미에 짓이겨져 시멘트 바닥에 억억한 주검을 얹어 놓은 채 그는 틀림없이 갈 것이라,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어쩌지 못한다고 했던가, 대대손손 부익부빈익빈의 개 같은 세월 아래서 궁굴리고 몸부림쳐봐야 부처 손바닥 안에서 재주넘는 원숭이라,

두 세끼 밥과 궁한 찬에도 배부르면 그것이 세상 다 얻은 호사인줄로 아는 이 박소하고 눈물 나는 찌꺼러기 궁민들의 애달픈 삶과 생을 어떤 배부른 시러배 아들놈들이 손가락질하고 감히 말장난을 하는가, 그러지 말자 천벌 받는다, 가난은 지은 죄가 아니다, 도처에 널려있던 죄의 덩어리가 그에게로 간 것 뿐.

오늘도 텔레비전과 인터넷에서는 그 잘난 연예인과 운동하는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도배를 하고, 그 잘난 정치꾼들이 삿대질과 큰소리가 생중계가 되고, 그 잘난 대통령은 입만 벙긋하면 사대강과 세종시와 사랑하는 ‘궁민’ 여러분에게 하늘에서 별을 따 준다고 소리소리 지르고 있다.

이 사랑 뒤집어 쓴 ‘궁민’들이 오늘도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목 메달아 죽고 그놈의 사랑에 깔려죽는 동안, 한 쪽에서는 배불러 게트림을 하면서 희희낙락 세상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자신의 기분이 내키는 대로 쥐락펴락 유린의 삶을 살아가는 부류가 존재하는 작금의 세월이, 그 잘난 사람들의 눈에 흙이 들어가고 양심의 털이 뽑히지 않는 한, 사랑 뒤집어 쓴 죽어나가는 궁민들의 삶은 끝까지 죽음일 수밖에 없을 것임.

얼어 죽을 만큼 추운 날씨다. 요즘 들어 부쩍 산짐승들이 집 주위로 내려와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헤매고 다닌다. 그것들도 무척이나 생이 힘들고 서러운 모양이다. 그러나 죽어지지 않는 목숨, 새 잎들이 오송소송 돋아오를 그 때까지는 어떻게든 살아야하지 않겠니, 새해가 오고 봄이 올 동안 아, 산 속 어디에서라도 있으라, 그러면 된다, 되겠지……. 

- 할복을 꿈꾸며 -

산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칼을 간다
칼끝으로
느릿느릿 올 그대여
그대 품에 안겨
잠들고 싶어
단 한 번 깊이 잠들어
빈속으로
일어나고 싶어
피도 가고
창자도 끊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