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 민종식, 아! 나는 '충남 청양인'이다
의병장 민종식, 아! 나는 '충남 청양인'이다
  • 백제뉴스
  • 승인 2015.08.05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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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주년 특별기고]정학진 청양군 주민복지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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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난해 광복절 특별기고에서 “ 청양은 홍주의병의 본향이다”라는 제하의 기고를 통하여 홍주의병의 발원지가 청양이고 그 분들에 대한 숭고한 뜻을 기리는 '청양의병사우' 건립을 제안한바 있다.

사실 홍주의병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볼 때 홍성과 청양을 '홍양'이라 부를 정도로 청양과 홍성을 분리하여 홍주의병을 기술할 수는 없다.

홍주의병은 목표가 홍주성의 점령이자 탈환이지 의기의 주체는 청양이기 때문이다.

1800년대 말 우리 청양에는 나라를 잃은 슬픔에 두 분의 거장이 청양에 둥지를 틀면서 항일에 대한 충절의 서기는 한층 더 뜨거웠다. 그중 한분이 우리가 잘 아는 면암 최익현 선생이요, 또 한분은 윤조 민종식이다.

면암은 목면 송암리 장구동에 모덕사 사우를 건립하고 매년 2회씩 춘추대의제로 그의 높은 뜻을 기리고 있으나 윤조 민종식은 청양에서 의진을 규합하고 총 지휘한 의병장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하지 못하는 아쉬움에 광복70주년에 즈음하여 그를 조명하고자 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관을 지낸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고, 원유한 박사는 윤조 민종식 선생을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했다.

‘구한말 가장 손꼽히는 명문에 태어나 모든 영달이 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일 먼저 의병활동에 나선 용기 있는 지사이다’

또한 그의 인척이 구한말의 세도가로 윤조는 민씨 가문의 종손이고 주변의 선망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아왔음에도 주어진 영달의 길을 과감히 뿌리치고 구국항일 전쟁의 가시밭길을 택했다.

이러한 윤조가 이조참판의 자리를 버리고 정산을 의병의 본거지로 잡은 이유는 그의 아버지인 민영상이 충청관찰사로 있을 때 정산에서 자랐다고 하는 연고지이자, 그 당시에도 청양이 영호남을 아우를 수 있는 지리적 중심지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민종식이 이끄는 의병은 일본의 헌병이나 경찰, 우리의 관군 모두 진압하기가 불가능 할 정도로 당시 한국주둔 일제병력이 총 동원하도록 하는 우리의 의병사상 획기적인 전투를 벌인 것이 특징이다. 비록 패하더라도 바로 모병을 하여 끝까지 항쟁 피아간에 피해가 컸기 때문이다.

1. 청양에서 출정하여 홍주성 함락까지

1906년 3월 17일 민종식을 의병대장으로 하는 의진은 청양장날 계획대로 홍주성으로 출정하면서 중간지점인 광시장터에서 의병을 규합하니 모인 군중이 3000여 명으로 편대를 정비 3월 18일 홍주성으로 진군을 했다.

경무성 경무국장 출신인 홍성군수 이교석은 조양문에서 의병을 회유 입성을 거부하였고 의병 수뇌부의 중의에 따라 공주로 말머리를 돌려 비봉면 중묵리에 이르렀을 때 공주와 서울시위대 병력 200명이 청양읍에 휴식중이라는 소식에 화성면에 진을 치고 하룻밤을 보내는데 관군과 일본군이 새벽에 기습, 의병 40여명이 붙잡혀 공주로 압송되어 의병의 1차 전투는 실패했다.

민종식은 5월 12일 청양의 안병찬, 이세영, 채광묵 등과 부여 이용규의 협력으로 1천여명의 의병으로 다시정비하고 홍산을 거쳐 서천읍을 점령 이종석 서천군수를 구금하고 비인과 보령 남포 전투에서 승리를 했다.

의병은 승리의 기세를 몰아 광천을 거쳐 결성에서 1박을 한 후 홍주에서 대항하는 적군을 격파하고 성중에 포화를 퍼붓자 적군과 거류 일본인은 북문으로 달아나 예산으로 도망가 홍주성을 점령하니 청양에서 출정한 지 63일 만인 5월 19일이다.”

2. 홍주성 점령이후 윤조의 생애

홍주성의 점령이후 일제는 5월20일 공주경무대 지부 대원을 파견하여 탈환을 도모하였고 5월 21일에는 수원 헌병대를, 5월 22일에는 서울경무대원을, 24일에는 공주 진위대가 각각 증원 탈환을 도모하였으나 실패하고 특히 28일에는 서울 헌병대가 정찰목적으로 활동하다가 의병에게 적발 포위 체포되는 등 패전을 거듭했다.

패전에 화가 난 이등박문은 증원부대와 협력 할 것을 명하면서 한국에 주둔한 전 병력이 동원된 셈이다. 여기에다 5월 30일 새벽 1시에는 보병 제60연대 2개 중대와 전주 수비대의 1개 소대를 합세시켜 포위선을 형성하니 전세는 아군 측이 불리해진다.

이에 윤조의 창의군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총포로 항전하였으나 1906. 5. 31일 새벽 4시경  일군에게 결국 성을 내주고 만다.

일제는 서문 밖 민가에 방화하고 맹렬한 사격을 가하는 동시에 뒤이어 성으로 진입하자 이에 반격을 가해 시가전을 벌였다.

이날 의병은 일본군 10명을 사살하고 4명을 생포하여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군비가 충분치 못하고 한 밤중에 기습을 받는 악전고투에서 의병의 피해는 한층 심각했다.

홍주성에서 패한 윤조는 다시 의병을 일으켜 예산성을 도모하려다 1906년 11월 공주에서 일본 헌병대에 피체된 후 1907년 7월2일 「政事를 변경하기 위하여 亂을 일으킨 者」라는 죄명으로 교수형인 사형선고를 받고 7월4일 법무대신의 주청으로 유종신형으로 감형하여 진도로 유배된 후 같은 해 12월3일 융희황제특사로 풀려난다.

특사로 풀려난 윤조는 패전 이후 일본 헌병대의 쫓고 쫓기는 잠행의 여독과 옥중에서의 혹형 등으로 1917년 6월 5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고종의 “윤허”를 받았다는 설 역시 당시 의병장으로서는 명문가문의 최고직위인 이조참판출신이고 재판 이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그리고 특별사면으로 이어지는 감형으로 볼 때 이를 뒷받침하고 있으나 확인은 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의병으로 성공한 예는 없다. 하지만 한때 그는 홍주성을 탈환 했다. 그리고 후일을 도모하다 잡힌 순국선열이다. 정부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선생의 업적을 빛내기 위하여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한바 있다.

3. 사후에도 「민종식」은 ‘청양(정산)인’이였다

윤조는 1861년 경기도 여주군에서 판서 민영상(충청관찰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2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나 1895년 그의 나이 35세에 을미사변을 맞아 국모시해의 참변을 당하자 관직을 버리고 어려서부터 이주하여 살던 청양 정산에 돌아와 의병활동의 기반을 굳힌다.

정산에 낙향한지 10년째 되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윤조는 상경하여 을사조약의 폐기운동을 벌였으나 민씨 집안의 소극적인 태도로 실패하고,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방법으로 의병활동을 벌이려고 결심한 후 1906년 3월 청양의 이세영과 안병찬, 채광묵 등과 함께 의거 할 것을 결의하고 청양군 정산면을 근거지로 하는 격문과 각국공사에 청원서를 보내고 자기소유의 전 답을 팔아 군자금을 마련하면서 일생을 구국을 위한 항일투쟁에 몸 받친 전형적인 선비형 의사이다.

그러나 청양을 근거지로 의병을 주도했던 민종식에 대한 향토적 차원의 학술연구나 그를 추모하는 일이 그동안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아니 청양뿐만 아니라 어느 지역에서도 그의 손을 잡아주는 곳이 없었다.

그는 사망한 후 경기도 여주 선영에 모셨다가 1974년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 이장 안치되었다. 홍주의병에 가담한 분 중 국립묘지에 안장된 분은 민종식 뿐이다.

그의 묘비 음기에는 “충남 정산인”이라 써있다. 윤조는 비록 여주에서 태어났지만, 이조참판의 높은 벼슬을 던져버리고 청양에서 나라를 위해 젊음을 불태웠던 그는 진정 ‘청양인’이다.

윤조의 청양사랑과 앞으로의 과제

윤조는 죽어서까지도 청양인 이기를 원했고 나라와 청양을 사랑했다.「청양이 홍주의병의 ‘본향’」인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정산면 천장리에는 민종식 고택이 현존하고 있으니 더 말 할 나위가 없다. 윤조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인물 중 “청양인”이 틀림없다.

「광복70주년」에 즈음하여 1974년에 세워진 당시의 묘비도 복원하는 방안과 ‘청양인’으로 그의 높은 뜻을 기려야할 것이다. 아울러 2016년은 청양거의 11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점으로 청양의병에 대한 향토적 학술가치를 재정립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도 초야에 묻혀 아직 현창되지 않은 분들의 숭고한 넋을 위로하고 이를 더욱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할 때라 생각한다.

충절의 정신은 청양의 정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