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힘
묻힘
  • 육복수/시인
  • 승인 2008.05.13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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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하얗게 겁에 질려가지고 와서는 나에게 사실을 이야기 하고는, 어떡해야 좋을지 상담을 하는 이 녀석을 한참 쳐다보다가 결국은 진실을 왜곡시키는 해답을 주고 말았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우리 학원에 다니는 이 녀석이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창밖을 내다보다가, 선배 몇 명이 선생님의 승용차 앞 유리에 스프레이를 뿌리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했다는 것이다.

오후에 선생님이 스프레이 장난을 한 차를 봤는데, 한 대가 아니라 여러 대가 그렇게 되어있었다는 것이고, 그러다보니 학교가 시끌거렸고, 학원에 와서 친구들과 학교에서의 사건을 이야기하다가 이 녀석이 친구들에게 자신이 사건 현장을 봤다는 이야기를 해버린 것이고,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제 딴에도 암만 생각해도 그 친구들이 승용차 주인인 선생님에게 이야기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다시 학원으로 돌아와서는 나에게 상담을 한 것이다.

어떻게 사건이 전개 될 것 같냐고 녀석에게 물었더니, 친구들이 선생님에게 이야기를 하면, 선생님이 자신을 불러서 확인하고, 선배들이 벌을 받을 것이고, 그러고 나면, 자신이 선배들에게 당할 것 같다는 추리를 했다. 추리를 해가면서 녀석은 더욱 질려갔고, 참으로 난감한 일이였다.

나이로는 아직 어린 중학생이지만 그렇지 않아도 청소년과 연관된 흉흉한 사건들이 비일비재한데, 보통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선생님이 비밀을 보장해 준다고 해도, 친구 여러 명에게 이야기한터라 언젠가는 소문이 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학교생활 자체가 힘들어질 것은 뻔한 일이라, 녀석에게 거두절미하고 선생님이 내일 아침에 부르시면, 친구들이랑 학원에서 공부하다가 농담으로 장난친 말이라고 우기라고 일러줬다.

다음 날 저녁에 녀석이 학원에 와서는 나에게 고맙다고 고맙다고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내가 시킨 대로 했더니 선생님께서 ‘이 실없는 놈아’라며 빨리 교실로 가랬단다. 그리고 그냥 무사히 넘어갔단다. 녀석을 앉혀놓고 한참을 이야기해 주면서도 마음이 편치를 않았다.

녀석은 아무런 잘못도 없이 본 대로 말한 것뿐인데 그렇게 떨면서 가슴을 조여야 하고, 내 자신도 그것을 거짓말로 덧씌워 말하게 하는 이 희한한 상황에 속이 뒤틀리며 속이 메스꺼워졌지만, 진실은 이렇게 간단하게 묻히고 마는 것이다.

보지 말고 듣지 말고 말하지 말라는 말이 맞는가 보다. 그러나 거짓말로라도 한 아이의 무사함에 위안을 해야 할지 어쩔지 마음이 무겁다.
 

봄 산

얼마나 울었길래

꽃이 다 피냐

얼마나 아팠었길래

붉은 멍이 다시 도지냐

얼마나 이 악물고

죽었었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