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연대가 시급하다
대학에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연대가 시급하다
  • 강수돌(고려대 교수, 조치원 마을 이장)
  • 승인 2008.04.01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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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삶을 마감하면서 이 글을 쓰는 것은, 더 이상은 이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그럴듯한 구호나 정책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진정한 반성과 성찰 없이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사항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2월 말, 비정규 교수이던 한경선 박사가 어린 딸을 바로 옆에 둔 채 삶을 마감하면서 남긴 유서의 일부다. 또 그 사랑하는 딸은 뜻하지 않은 엄마의 죽음 앞에 ‘내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고 사랑하는 엄마에게’라는 편지를 썼다. 그 딸은 “…그러고 보니깐 난 엄마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던거 같아. 나에 대한 일만 말하고 엄마에 대해서는 별로 물어 본적이 없었던 거 같아. 너무 궁금한데... 맨날 나중 나중으로 미루다가 결국 이렇게 물어보지 못했네. 나중에 아주 나중에 우리 다시 만나면 다 물어볼꺼야. …”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의 최고라는 서울대에서조차 2003년에 백준희 박사, 2006년 권기록 박사, 2008년 불문과 강사 등이 자살했다. 다른 대학들에서도 박사들의 자살은 꾸준히 이어진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비극을 부르는가?  한경선 박사는 한국 현실을 이렇게 진단한다. “귀국 초에는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듯, 열심히 강의하고 논문 쓰면 학교에 자리를 잡을 수 있으리란 마음으로 하루를 쪼개어 고시원과 독서실을 전전하며 토요일이든 일요일이든 열심히 논문을 쓰며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선 이러한 연구업적과 강의경력과는 다른 무언가가 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깨닫기 위해서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렇다. 누구든 학문의 길로 접어들었을 땐, 열심히 공부하고 논문을 쓰면 언젠가는 안정된 자리를 잡고 제대로 연구와 강의를 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한경선 박사로 대변되는 전국의 10만여 비정규 교수들은 갈수록 그런 꿈이 일부 소수에게만 현실이 되고 나머지 대다수에겐 여전히 꿈일 뿐임을 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한경선 박사는 자신의 삶을 마감할 절박한 순간에 “부양가족을 지닌 경제적 뒷받침이 없는 상태에서 다년간 시간강사로 버티기는 불가능하고, 강의교수로 지내면서 임용에 필요한 정도의 논문을 쓰기는 사실상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라 고발한다. 나아가 “뜻 맞는 몇몇 학교들끼리 연합해서 압력을 가하기 위해 한 특정인의 학교 임용을 가로막아, 그의 학문적 업적이나 발전을 저해”하는 특수한 현실도 개탄했다.
 
물론 요즘엔 “특정인의 임용을 가로막”는 일은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다. 더 흔한 일은 “영어로 강의를 얼마나 잘 하는가”, “학부 출신이 어느 대학인가”, “유명 국제 저널에 논문이 얼마나 실렸는가” 등이다. 세계화를 지향하는 취지에서 보면 영어 강의나 영어 논문은 한 가지 지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개인이 가진 학문적 태도와 역량, 학자로서의 인품과 통찰력 등이다.
 
한편, 나라에서 모든 비정규 교수들을 정규화하기 어렵다면 그 불안한 지위와 신분만이라도 ‘교원’으로서 안정화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대학 강의의 절반 가까이를 비정규 교수들이 담당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들의 불안정한 지위는 일 년에 1천만 원 가까운 등록금을 내고 수업을 받는 대학생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즉 고등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해서라도 비정규 교수의 교원 지위는 보장되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존의 정규 교수들과 비정규 교수가 연대할 필요성이 커진다. 대학 사회의 불공정한 임용 과정을 보다 투명하고 정의롭게 만드는 일, 월급과 혜택을 쪼개서라도 비정규 교수들의 불안정성을 줄이거나 없애는 일, 그리하여 진리 탐구와 정의 사회를 위해 함께 땀 흘리는 일, 이런 것들이 우리 모두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더 이상 한경선 박사와 같은 죽음을 막고 참된 학문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