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독립운동가 장인환(張仁煥)선생
3월의 독립운동가 장인환(張仁煥)선생
  • 백제뉴스
  • 승인 2008.03.03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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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앞잡이 스티븐스를 쏘다
▲ 장인환(張仁煥)선생(1876. 3. 10~1930. 4. 24)

장인환(張仁煥)선생(1876. 3. 10 ~1930. 4. 24)
◈ 일제의 앞잡이 스티븐스를 쏘다  ◈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대동보국회 회원으로 활동
·1908년 일본제국주의 선전을 일삼던 친일 외교관 스티븐스(D.W.Stevens) 처단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선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장인환 선생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76년 3월 평안남도 평양군 대동면에서 태어났다. 어릴때 부모님을 여의고 어렵게 생활하다 여의치 못하여 1904년 그의 나이 28세때 하와이에 노동이민으로 도미하였다.

그 후 1906년 8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된 미주 한인의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보국회의 회원이 되었으며, 주로 철도 노동자와 알래스카 어장에서 노동 등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모색하였다.

1908년 3월, 당시 대한제국 외교고문으로 있던 스티븐스가 일제의 대한제국 외교권의 강탈로 인해 국제여론이 악화되자, 일제의 지령으로 자신의 본국인 미국에서 대한제국의 무능함을 적극 홍보하고 일제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는 선전활동을 펴고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신문기자들에게 을사늑약을 비호하고 한국을 비판하는 내용의 발언을 하였고, 이에 항의하는 동포대표들을 만난 스티븐스는 방자하고 무례한 태도로 이완용을 충신이라하고 한국의 인민은 우매하여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하는 등 폭언과 궤변을 서슴치 않았다.

이미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어떠한 성토와 반박으로는 실효를 거둘 수 없다고 생각한 선생은 그를 저격하기로 결심하였다.

1908년 3월 23일 아침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 페리선창에 도착하자 그를 향해 총을 겨냥하려 할 때  한 남자가 돌진하여 스티븐스와 격투가 벌어졌다. 그 남자는 전명운의사로서 스티븐스를 처단하기 위해 권총을 발사하였으나 불발이 되어 그에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선생은 이 기회를 살려 권총을 세발 발사하여 두발이 스티븐스의 가슴과 다리에 명중하였고 한발은 전명운의사의 어깨에 맞았다.

총탄을 맞은 스티븐스는 3월25일 병원에서 사망하였고, 선생은 1908년 12월 미국 법정에서 징역 25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9년 1월 10일 가석방되었고, 이어 1924년 4월 10일에는 완전자유의 몸이 되었다. 1927년 4월 20일 잠시 귀국하였으나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감시와 옥고로 인한 신병 때문에 그해 10월 11일 다시 샌프란시스코에 돌아가 생활하던 중 1930년 4월 24일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