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도하며
또 한 번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도하며
  • 백제뉴스
  • 승인 2011.03.23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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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월 대전역에서 1개월간의 노숙체험을 끝내고 사역을 시작할 때, 기독교대한감리회 남부연회에서 실직노숙인을 위한 성탄절 특별헌금으로 모아진 300만원이 전부였다. 당시 그 금액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궁리 끝에 시작한 것이 매일 밤 컵라면을 나누는 것이었다. 매일 밤 10시경,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라면 한 개는 역 대합실에서 잠을 청하는 거리 노숙인들에겐 허기도 달랬지만 나름대로 잠시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기도 했다. 이렇게 컵라면 나눔을 생각하게 된 것은 처음 노숙체험을 시작할 때 남재영 목사님께서 대전역 노숙인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나보다 앞서서 45일간 노숙을 하면서 터득한 노하우를 전수해준 비법에서 아이디어를 얻게 된 것이다.

한 겨울 추위와 허기를 견뎌야 하는 거리노숙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나는 광장 한 귀퉁이에 박스를 깔고 뜨끈한 라면국물 한 모금으로 동료들을 유인(?)해서 그들의 과거사와 삶의 애환을 듣는 것으로 노숙체험을 시작했다. 노숙체험을 하게 된 것은 앞으로 노숙인 사역을 위한 것으로 그들을 알아야 어떻게 돕고, 일으켜 세워야 하는지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1개월간의 노숙체험을 끝내고 시작한 컵라면 나눔으로 잠시 추위와 허기는 잊을 수 있어도 근본적으로 추위를 이길 수는 없었다. 이런 와중에 대전역에서 한 바탕 소동이 있은 후에 매일 저녁 광장 한 귀퉁이에 천막 두 동을 설치할 수 있도록 역장으로부터 하락을 받아 저녁이면 아담한 두 채의 천막집을 짓기 시작했다. 비록 저녁에만 생기는 천막집이었지만 대합실에서 쪼그리고 잠을 자는 것보다는 두 다리를 쭉 펼 수 있어 훨씬 안락한 잠자리가 되었다. 먹는 것과 자는 것이 해결되자 의료가 문제였다. 그래서 인근 약국을 찾아다니며 상비약을 후원받아 필요한대로 나누어 주었고, 일자리를 위해 동구청과 고용지원센타를 찾아 다니면서 거리 노숙인들이 일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았다. 이렇게 해서 대전역 거리 노숙인들이 2주짜리 공공근로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비록 사무실은 없었지만 나름대로 천막집을 중심으로 거리 노숙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렇게 시작된 활동의 비용은 고작 300만원이 전부였다는 것이다. 이 돈이면 매일 제공되는 컵라면과 천막집에 들어가는 난방 석유 등의 비용으로 채 두 달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정기적으로 돕는 교회나, 단체, 개인이 없었던 상황에서 무슨 배짱으로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우선 시작하고 본 대전역 사역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활동이 정기적인 도움이 전혀 없이 거의 1년을 지속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 당시는 정신없이 지내느라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나 벧엘의집 공간이 마련되고 대전역 사역을 정리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모든 원동력은 다름 아닌 대전역을 오가던 가난하고 고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채워졌다는 것이다.

내가 원칙처럼 여겼던 것 중이 하나가‘먹는 것 가지고 치사해지지 말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라면을 먹고 싶어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날 나룰 분량 안에서는 함께 나누었다. 그 당시가 노숙인이 사회의 가장 중요한 이슈였기에 대전역에는 많은 구호 활동이 있었다. 정말이지 내가 노숙체험을 할 때, 어느 날은 쫄쫄 굶지만 어떤 날은 하루 다섯 끼를 먹을 수 있는 경우가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급식 줄에 서서 배식을 받으려고 하면 봉사를 나온 분들이 노숙인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며 노숙인에게만 배식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종종 시비가 생기기도 했었다.

그래서 나는 배고픈 것은 누구나 다 배고픈 것이기에 노숙인이니 아니니를 구분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대전역에는 노숙인 뿐만 아니라 합승택시기사아저씨 ‘쉬었다가세요’라며 광장을 빠져나가는 남자들을 유혹하는 아주머니들, 고되게 하루 일을 마치고 마지막 기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노동자들도 그 시간이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배고픈 사람에겐 누구나 먹을 것을 나누자라는 생각에 컵라면을 먹고 싶다는 분들에게는 그 날 분량 안에서 자연스럽게 나누다 보니 이분들이 이생했는지, 꼭 어디서 나왔느냐는 질문을 한다. 그러면 나는 감리교 목사라고 대답하면, 어느 교회를 담임하고 있느냐며 다시 묻는다. 교회는 담임하고 있지 않으며 대전역에서 사역하기 위해 시작했다고 하면 수고하세요 하며 지나가는 사람, 어떤 이는 목사님 라면 값입니다 라며 내 손에 쥐어주는 천원짜리 한 장 내지는 몇 장 등... 이렇게 그 분들이 라면 값으로 준 돈들이 모아져 1년을 버틴 것이다. 내가 가장 큰 돈을 받은 것이 독일 선교사라는 분이 약 오만원 정도의 돈을 주신 것이 가장 큰 후원금이었다. 하루는 라면이 떨어져서 대전역으로 나가야 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다가 그냥 나가서 오늘은 라면이 떨어졌다고 말해야지 하고 나갔는데 라면박스를 들고 오는 행렬이 내게 오면서 대전역 인근 금강산 약국이라는 곳에서 내 이야기를 듣고 라면을 후원했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지만 묘하게도 1년을 그렇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처음 시작한 컵라면 나눔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기적과 같은 하나님의 동행이었다.

나는 이것을 현대판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고백한다. 아무 대책도 없이 시작했지만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자신도 가진 것은 없지만 함께 나누었던 가난한 사람들은 곧 광야에서 예수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드린 어린아이의 정성이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보리떡을 통해 함께 나눔으로 배불리 먹고 남게 하신 것처럼 비록 컵라면 한 개였지만 마음을 담아 나눌 때 1년을 계속할 수 있도록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이 무모하게 뛰어든 광야에서 매 순간 함께 걸어가시면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벧엘 사역을 지키신 것이다. 대전역에서의 나의 첫 출발은 이렇게 순간순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동행을 아주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던 시기였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함께 출발한 벧엘사역이 벌써 13년차를 맞이했다. 지금 벧엘은 처음 벧엘과 비교하면 상전벽해와 같이 성장해 버렸다. 컵라면과 천막집이 전부였던 시작과 비교해보면 지금은 남성쉼터 울안공동체, 여성쉼터 한나의집, 무료진료소인 희망진료센타, 자활공동체인 희망의집, 주거지원사역인 울이공동체, 사회적기업 야베스공동체, 지역사회공동체를 위한 희망지원센타 등 많은 기관과 사역을 담당하고 있다. 그럼에도 항상 내 마음을 무겁게 했던 것이 바로 공간문제였다.

당장 일은 필요했고 공간을 마련할 비용은 없어 월세로 공간을 얻다보니 어느 순간에는 월세 부담이 너무 커지기도 했었다. 아무리 부담이 되더라도 월세는 다른 것을 줄여서라도 해결하면 되지만 그것보다 더욱 나를 아프게 했던 것이 바로 남성쉼터인 울안공동체의 공간문제였다. 울안공동체는 정원이 40명인 남성 노숙인 쉼터이다. 그런데 정부가 정한 기준에고 턱없이 부족하고, 달랑 침실 두 개에 콩나물 시루의 콩나물처럼 칼잠을 자야 하고, 주방이나 기타 휴식 공간이 없어 쉼터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열악한 공간이었다. 한 마디로 가축 사육장과 비슷했다. 공간이 너무 협소하여 늘 미안한 마음에 백방으로 남성쉼터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애를 써 봤지만 그때마다 묘하게 꼬이기도 하고, 돈이 부족하기도 하여 지금까지 공간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래서 때론 공동체 가족들에게 우리에게 필요한 공간을 허락해 달라고 같이 기도하자는 얘기를 수도 없이 많이 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 지난 달 말경에 대전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울안공동체가 갈 수 있는 아주 마땅한 건물이 나타난 것이다. 때론 마땅한 건물이 있어도 노숙인 쉼터라고 하면 반대하는 건물주가 있는가 하면, 우리에게 마땅한 건물은 세가 비싸거나, 쉼터로서 위치할 곳이 아니어서 늘 어긋났었는데 이번 건물은 모든 조건에서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건물주도 월세를 아주 저렴하게 주시면서 나머지는 후원하는 셈 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당신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었다. 그러나 정작 지금부터가 더욱 큰 문제였다. 월세야 또 허리띠를 졸라매서라도 해결해 보자고 했지만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내부공사가 필요한데 공사비는 한 푼도 없다는 것이다. 그것도 한 두 푼이 아닌 약 8,000만원 정도가 소요된다고 하니 벧엘의 능력으로는 상상이 안 되는 금액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걱정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것처럼 울안공동체 식구들이 인간다운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달라고 기도했고, 이제 그것의 첫 장이 열린 것이다. 그러기에 여리고와 같은 거대한 장벽처럼 여겨지는 공사비도 당신께서 많은 돕는 손길을 통해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니 다시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공사도 우리가 직접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면 공사비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결정이다. 내부공사를 해 본 것도 아니고, 기술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각각 기술을 가진 분들이 대전역에서 나에게 꼬깃꼬깃한 천원짜리 한 장이 보리떡 다섯 개가 되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것처럼 우리가 함께 협력하면 기적은 오늘 우리의 현장에서 일어날 것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

공사비 8,000만원도 지금부터 모금하기로 했다. 한 푼도 모아진 것은 없지만 하나님은 당신께서 준비한 사람을 통해 공사비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사람도 보내주실 것이라 믿는다. 경제적 이익이 아닌 마음으로 다시 뭉쳐 13년 전 대전역 광장에서 일어났던 오병이어의 기적이 다시 일어날 것을 굳게 믿는다.

             벧엘의집 원용철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