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으나 서나 교육 생각
앉으나 서나 교육 생각
  • 이달우 공주대 교수
  • 승인 2007.09.08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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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다고 생각했던 여름방학도 다 지나고 2학기가 시작되었다. 시작에는 늘 긴장이 함께 한다. 첫 시간 강의를 어떻게 하는가가 한 학기 동안 그 강좌 전체에 주는 영향은 매우 크다. 그만큼 첫 시간을 근사하게 시작해야 한다. 이제는 강의를 거의 습관처럼 맞이하게 되었지만,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불안한 마음이 따라붙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준비가 충분하지 않을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나는 매 학기 첫 강의에는 가능하면 인상적인 화두(話頭)를 들어 학생들이 바람직한 공부의 방향을 찾는데 도움을 주려고 노력해 왔다. 지난 수 년 동안 나는 어떤 강좌이건 첫 시간에는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의 도자설(盜子說)을 말해 주는 것으로부터 강의를 시작하였으며, 나름대로 상당히 효과를 보았다고 생각한다.
 
사숙재는 한 아비 도둑이 그 자식에게 도둑질을 가르치는 비유를 통해 학문을 하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마음에 스스로 얻음(自得於心)’이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학문의 방법을 도둑질에 비유한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이 얘기는 짤막하면서도 설득력이 있고 또 재미도 있다.
 
두꺼운 책을 펼치고 딱딱한 이론을 들고 나올 것을 예상하던 학생들은 나의 부담 없는 옛날 얘기에 솔깃하여 눈을 반짝이며 귀를 기울이고 집중하게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강의의 절반 이상의 효과는 접어놓고 들어가는 셈이다. 물론 사숙재가 그랬던 것처럼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 어쨌든 나는 이런 재미에 이끌려 꽤 오랫동안 이 얘기를 우려먹었다.
 
소크라테스는 [변명]에서 ‘캐묻지 않는 삶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하였다. 철학적 삶의 방법론을 말한 것이다. 우리는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일상에 대해 끊임없이 ‘왜 그런가?’하는 의문을 갖고 또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교사를 지망하는 우리 학생들이 자신의 삶과 교육에 대해 부단히 자문자답하고 성찰하도록 하여 그들로 하여금 살만한 가치를 얻도록 해주어야 한다. 교육의 이론과 실제에 대한 깊이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것은 내가 어떤 강의에서건 힘을 기울이는 근본적인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
 
교육의 이론과 실제 또는 자신에 대한 성찰이 제대로 이뤄지려면 무엇보다도 그러한 인식과 사유의 주체인 내가 중심을 잃지 않고 바로 서야 한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뽑히지 않는다. 꽃과 열매도 많게 마련이다. 사숙재가 강조했던 ‘스스로 얻음(自得)’도 결국은 피동적인 학습보다는 능동적인 공부를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능동적인 공부를 통해 ‘자득(自得)’이 제대로 이뤄지려면 ‘캐어물음’과 인식이나 사유의 주체인 내가 중심에 있어야 한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을 따라다니는 학습은 바쁘기만 할 뿐 성과도 시원치 않다. 삼라만상으로 하여금 중심이요 근본인 나를 축으로 하여 움직이도록 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러면 일은 적고 성과는 갑절 이상으로 오게 마련이다.
 
근본이 선 다음에는 동동촉촉(洞洞燭燭)한 마음자세로 자신의 일을 해야 한다. 공부를 해야 한다. 우리 학생들은 사범대학생들인 만큼 교육(학)에 대해 캐묻고 사유해야 한다.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이라는 유행가가 있다. ‘앉으나 서나 교육 생각’을 해야 한다. 이것을 좀 딱딱하게 표현하면 교육적 동정론(動靜論)이라 할 수 있다. 교육적 동정론은 우리가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하든 항상 교육적 안목과 잣대에 따라 보고 듣고 말하고 상량(商量)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장차 훌륭한 교사가 되기 위한 지름길은 저절로 열릴 것이다. 뚫기 어렵다는 교사임용시험의 관문도 거칠 것이 없을 것임을 확신한다.
 
사범대학에 들어와 훌륭한 교사가 되기 위해 불철주야(不撤晝夜) 공부에 열중하는 우리 학생들에게 나는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 ‘앉으나 서나 교육 생각’에 철저해야 한다. 성심을 다해야 한다. 그러면 훌륭한 교사가 될 수 있다.
 
언뜻 생각하면 쉬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또 그리 만만한 것도 아니다. 사실 나 또한 요 며칠 외물(外物)에 현혹되어 중심을 잃고 그 것들을 따라다녔다. 그러다 보니 강의 준비는 물론이거니와 이 짧은 칼럼 원고마저 간신히 날이 다 밝아오는 시간에 신문사에 송고(送稿)하고 있지 않는가!
 
학생들보다 먼저 나부터 이 기회에 다시금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아 본다.

                                                           이달우(공주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