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무장독립투쟁의 중심, '오동진 장군 ' [2]
항일무장독립투쟁의 중심, '오동진 장군 ' [2]
  • 백제뉴스
  • 승인 2021.12.09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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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전병철 작가(전 공주고 역사교사)
'순국선열 오동진' 영위(국립 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 ⓒ출처:블로그 홍익인간
'순국선열 오동진' 영위(국립 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 ⓒ출처:블로그 홍익인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모두에게 존경받다

1932년 6월 21일 무기징역이 확정된 오동진은 1934년 7월 19일 무기형에서 20년형(1952년 출감이면 63세, 우리 나이로 64세에 출감)으로 감형되고, 다시 15년 형(58세 되는 1947년 6월 20일 출소 예정)으로 감형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일본인 의사가 그에게 내린 ‘형무소정신병’이라는 기이한 병명을 핑계로 정신병자로 분류되어 결국 1944년 강제로 공주형무소로 이감되었는데, 당시 공주형무소는 정신질환자를 수용하던 곳이었다.

그동안 많은 관심과 숱한 이야기를 남기며 17년이나 되는 모질고 고된 형무소 생활 끝에 더는 몸을 지탱하지 못한 오동진은 경성형무소에서 공주형무소로 이감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944년 12월 1일, 55세 나이로 순국(殉國)하였다. 8개월만 지나도 그가 그리 원하던 해방을 맞았을 터인데.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功勳)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建國勳章)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을 추서(追敍)하였다. 하지만 유족을 찾지 못해 훈장을 전달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훈장을 정부에서 보관하고 있다.

오동진은 후손이나 유족이 없을뿐더러 유해(遺骸)도 찾지 못하여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 위패만 모시게 되었다. 오동진은 남한은 물론 북한에서도 높이 평가하는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한 분이다.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묘지(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 무후(無後)선열제단에 그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오동진 위패는 ‘무후선열제단-001’로 맨 앞에 모셔져 있다.

한편 북한 애국렬사릉에는 그의 묘소가 조성되어 있는데, 공주형무소에서 순국한 오동진 유해가 왜 북한으로 옮겨졌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한국전쟁 당시 북으로 옮겨갔다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확인되지 않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공주 ‘공산성’ 입구에 가면

공주형무소에서 오동진이 순국하여서인지 현재 충남 공주시 금성동에 있는 세계문화유산 ‘공산성(公山城)’ 입구 한편에 그의 추모비(1982년 옛 공주군에서 세움)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는 ‘애국지사오동진선생추모비’ 외에 ‘근왕충신관류당노공숙의적비’와 ‘무이재오선생강표순의기적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오동진 추모비는 다른 두 비석에 비해 크기나 형태 면에서 상대적으로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다.

공산성 입구 한쪽에 있는 노숙 의적비, 오동진 추모비, 오강표 기적비 ⓒ백제뉴스
공산성 입구 한쪽에 있는 노숙 의적비, 오동진 추모비, 오강표 기적비 ⓒ백제뉴스

 

노숙(盧璛)은 이괄의 난으로 인조(仁祖)가 공주로 피난하러 와 있을 때 잠자리와 군량미를 제공하는 등 왕을 도운 인물이며, 오강표(吳剛杓)는 을사늑약과 한일병합조약으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울분으로 공주향교에서 자결한 인물이다. 왕을 도왔다 하여 노숙이 살던 마을은 ‘왕을 도운 마을’이란 뜻의 ‘조왕동(助王洞, 공주시 우성면 동곡리), 조왕골’로 불리기조차 하였다.

피난 온 왕에게 도움을 주었다 하여 마을 이름이 지어지고 그의 공덕을 칭송하는 노숙 의적비는 크고 화려하게 세워져 있지만, 나라 잃을 설움에 목숨을 끊은 이를 기리는 오강표 기적비는 작고 초라하다. 그리고 한평생 온갖 고생을 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무장투쟁으로 일제와 끝까지 싸우다 죽게 된 이를 추모하는 오동진 추모비는 더 초라하다. 푸대접이 이만저만 아니다. 어쩌면 우리 대한민국의 현실, 오늘날 우리 역사를 보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고 부끄러울 뿐이다.

조국 독립을 위해 오동진이 맹렬히 활동하던 조선국민회나 광제청년단 동지들이 모여 항일투쟁을 논의하던 청수동회의 장소, 조국독립을 위해 광복군 동지들과 함께 대한광복군총영을 창설하셨던 관전현 안자구(安子溝)와 광복군 사령부가 있는 관전현 향로구(香爐溝) 일대 산과 들에는 현재 항일기념비는커녕 안내판조차 서 있지 않다. 그곳에는 소중한 우리 항일투쟁의 역사에 별 관심 없는 중국인들이 살고 있으며, 조선족 동포들도 떠나버린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역사의 비정함과 함께 또다시 씁쓸하고 부끄러울 뿐이다.

현재 오동진에 대한 추모사업이나 기념사업은 현재 거의 없는 편이다.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는 1945년 12월 1일 서울 옥인동 중앙인민위원회에서 추도회를 열어 허헌(許憲) 비롯하여 옥중 동지였던 강일(姜逸) 등이 추도사를 하여 참석자 일동이 비분(悲憤)의 눈물을 흘렸다는 신문 기사 정도이다.

그리고 국가보훈처에서 ‘1993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전쟁기념관에서 ‘2008년 2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하여 관련 행사를 하는 것 이외에 별다른 선양사업이나 기념행사가 없다. 오동진을 기억하는 이들도 별로 없다.

유관순은 알고 홍범도와 김좌진은 알아도 그들보다 엄청난 무장독립투쟁을 펼친 오동진은 모른다. 오동진 추모비가 있는 공주에서도 그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공주시에서도 아무런 행사조차 하지 않는다. 관심조차 없는 편이다. 백제문화유산이나 백제문화제에는 지나칠 정도로 관심을 쏟고 있다.

그런 가운데 뜻있는 이들이 모여 2020년 12월 1일 처음으로 ‘애국지사 송암 오동진 선생 추모식’을 가졌다. 그가 순국한 지 76년 만에 치러진 일이다. 그리고 2021년 12월 1일 다시 추모식을 가졌다. 늦어도 한참 늦었지만 앞으로 ‘오동진추모사업회’를 꾸려나갈 계획이라 한다. 한편 다행이기도 하고, 또 한편 송구스러울 뿐이다.

2011년 충청남도 초정으로 도올 김용옥이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백제문화유적 답사하기 위해 공주와 부여를 방문하면서 2월 25일 공주를 방문하였을 때 가장 먼저 찾은 곳이 공산성 앞에 세워진 오동진 추모비였으며, “선생에 대해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이 분이 없었으면 김일성도 없었을 것이다.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다” “오동진 선생은 사회주의와는 전혀 무관한 인물이며,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이곳 공주에서 생을 마감했다”면서 “공주가 고향이 아닌 선생을 위해 추모비까지 세워준 것을 보면, 공주사람들은 매우 관대한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애국지사 오동진선생 추모비 ⓒ백제뉴스
애국지사 오동진선생 추모비 ⓒ백제뉴스

 

공산성 입구 구석,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그것도 초라하게 세워져 있는 오동진 추모비,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고, 가는 길도 마땅치 않은 애국지사 추모비.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하였는지? 정작 우리는 우리 삶과 상대적으로 거리가 먼 백제 유물에나 신경 쓰며 살아온 것은 아닌지? 어째서 오늘날 우리 삶에 직접 연결되어 있고 훨씬 더 영향을 주고 있는 근현대 자주독립운동, 항일독립투쟁에는 무관심한지 따져봐야 할 것이다.

꼼꼼히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더더욱 공주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이게 제대로 된 세상일까?

오동진은 김좌진, 오동삼과 함께 1920년대 항일무장독립운동을 이끈 3대 맹장임에도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더욱이 남북이 모두 존경하는 인물임에도 대한민국에서 그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김좌진보다도 더 많은 활약을 한 인물임에도 상대적으로 오동진을 아는 이들이 없다. 교과서에 이름이 나오지 않을뿐더러 그에 대한 기념사업이나 그를 기리는 행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역사 수업 시간에 항일무장투쟁 하면 홍범도, 김좌진, 양세봉, 지청천(이청천), 김원봉, 김두봉 정도가 교과서에 이름이 나오고 있다. 홍범도 하면 봉도동전투, 김좌진 하면 청산리전투, 거꾸로 청산리전투 하면 김좌진, 봉오동전투 하면 홍범도를 떠올릴 정도로 그리 배웠다. 하지만 봉오동전투를 이끈 총사령관은 최진동이며, 봉오동전투는 최진동을 비롯한 최운산, 김좌진, 홍범도, 안무, 한경세 등 여러 독립군 부대가 연합하여 함께 치른 전투이다.

청산리전투도 마찬가지 김좌진, 홍범도, 최진동을 비롯한 다양한 독립군 부대가 연합하여 치른 전투이다. 그런데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는 마치 홍범도와 김좌진 부대가 단독으로 치른 전투로 알고 있거나 홍범도와 김좌진이 중심이 되어 승리로 이끈 전투로 알고 있다. 잘못 알려진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아무래도 봉오동전투과 청산리전투가 벌어진 장소가 한국과는 거리가 멀고, 체제가 다른 나라에 있는 탓으로 그동안 연구 성과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서로 원수처럼 여기며 대립․갈등하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평가보다 오해하고 왜곡을 할 수밖에 없었던 정치적 현실 때문일 것이다. 하여 한쪽 입장이나 일부 의견만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것을 전부로 알고 가르치고 배웠기 때문에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잘못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봉오동전투와 홍범도, 청산리전투와 김좌진 활동이 왜곡되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데에는 이범석 역할이 컸다는 지적이 있다. 봉오동전투를 총지휘하며 승리로 이끈 독립군 부대는 ‘대한북로독군부’이며, 대한북로독군부는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안무의 국민회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등 6개 부대가 연합한 통합부대였다.

사령관은 최진동, 참모장은 최운산(최진동 동생), 작전참모 최치흥(최진동 동생)이었으며, 전투 당시 김좌진은 제1연대장, 홍범도는 제2연대장, 오하묵은 제3연대장이었다. 봉오동전투는 홍범도보다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 역할이 더 큰 전투였다. 그런데도 광복 이후 이승만 정부 때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을 지낸 이범석이 자신이 참여한 청산리전투를 내세우면서 자신과 김좌진을 청산리전투 영웅으로 과장하는가 하면 최진동․최운산․최치흥 형제의 공적을 깔아뭉갰다고 한다.

마찬가지 청산리전투도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부대가 독자적으로 수행한 전투가 아니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의군부, 의민단, 신민단, 한민회 등 독립군 연합부대가 함께 싸운 전투였다. 청산리전투에서 가장 용맹스럽게 싸웠던 부대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가 아니라 홍범도 부대였으며, 홍범도 부대는 일본군이 가장 두려워한 부대이자 가장 피하고 싶어 했던 부대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였던 이범석은 한국의 분노(1947), 우둥불(1971)이라는 책을 내면서 홍범도 부대를 일본군 5만 대병력의 기세에 지레 주눅 들어 새벽에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친 부대로 서술하거나 이범석 자신이 소속된 부대인 북로군정서를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심지어 김좌진보다 이범석 자신의 활약상을 크게 미화시켰다고 한다.

홍범도와 김좌진을 옹호하는 이들은 이런 지적을 의식하여서인지 실제 전투에서는 이들의 활약이 더 컸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홍범도나 김좌진에 대해 과대평가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에 비해 1920년대 항일무장투쟁을 줄기차게 펼친 오동진은 너무 과소평가되고 푸대접받고 있다. 비록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고 남북이 모두 존경하는 독립운동가로 인정하고 있지만, 현실에선 전혀 그렇지 않다.

어쩌면 우리 대한민국 사회에서 오동진이 푸대접받고 있는 것은 정치적 상황과 맞물린 탓이기도 하다. 오동진은 북한 김일성 아버지 김형직과 친구로, 김일성이 어린 시절에 김형직을 대신하여 김일성을 살펴주고 그에게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 오동진은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민족유일당 고려혁명당을 결성하며 공산당과 함께 손을 잡고 항일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런 이유로 반공을 앞세우던 대한민국에서 오동진을 내세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동진은 금기시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공산주의자 총에 맞아 암살당한 독립운동가 김좌진은 북한 공산주의와 대립하고 있는 남한에서 영웅으로 내세우기 안성맞춤인 인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김좌진은 실제 업적보다 과대평가 되고 엄청날 정도로 뜬, 독립운동가로 알려졌다.

또 오동진은 일제 밀정의 밀고로 체포된 탓에 해방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처벌받기는커녕 오히려 그들 세상이 된 대한민국에서 오동진은 뜨면 안 되는 인물이었다. 오동진같이 훌륭한 분이 밀정과 한국인 형사인 친일반민족행위자에 의해 붙잡히게 된 사실이 드러나고 알려질수록 친일파에 대한 반감이 커질 것이므로 해방 이후에도 친일파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오동진은 감춰질수록 유리한 대상이 되었다. 관심을 쏟을 인물이 아니었다. 공산주의자의 총에 맞아 암살당한 김좌진이 실제 업적보다 과대평가되고 엄청날 정도로 뜬 것과는 비교될 만큼 너무 다르게 오동진은 푸대접받게 되었다.

항일 무쟁독립 운동가인 송암 오동진 장군 추모식이 지난 1일 공산성 앞에서 거행되고 있다. ⓒ백제뉴스
항일 무쟁독립 운동가인 송암 오동진 장군 추모식이 지난 1일 공산성 앞에서 거행되고 있다. ⓒ백제뉴스

 

여기에 오동진은 남한 출신이 아닌 북한 의주 출신이고, 유가족이 한 명도 없다 보니 현실적으로 관심 밖으로 밀려나 묻히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없지 않아 나름 오동진에 대한 기념과 추모 행사를 해나가고 있으며, 또 대한민국이 발전하면서 독립운동에 관한 연구가 폭넓게 이루어지고 우리 사회가 한층 성숙하여 사회주의 활동하던 이들도 독립운동가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에 역사 교과서에 쌍성보전투, 홍경성전투, 보천보전투 등이 소개되기도 하고 동북항일연군, 조선의용군 등이 서술되고 있어 반쪽이었던 역사를 나름 보완되고 있다. 그래도 반쪽 역사이긴 하지만.

또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방법론에 대해서도 최근에는 무장투쟁 역할을 중요하게 평가하곤 한다. 3․1독립만세운동만 보아도 예전에는 ‘비폭력 평화적 시위’를 강조하며 우리 민족이 독립을 염원하는 ‘순수성’을 내세웠지만, 요즘에는 ‘무력 대응, 무력적인 저항’(면사무소나 군청, 경찰서 등 일제 식민통치기관을 습격하고 파괴, 일본인 지주나 상인, 친일 지주, 고리대금업자 응징 등)을 강조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평화적으로 시위하였지만, 만세운동이 지방으로 확대하면서, 만세운동의 중심이 학생․지식인에서 농민․노동자로 옮겨가면서 폭력적 성격을 띠었다고 역사 교과서에 서술되어 있다.

어쩌면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김좌진도 훌륭한 인물이지만, 오동진 같은 이들이 널리 알려지고 그런 분들의 이름이 교과서에 실리는 게 상식 아닐까. 많이 알려질 정도로 유명한 유관순도 소중한 인물이겠지만,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이후에도 항일여성운동단체에서 활동, 대한광복군총영 대원으로서 임신한 몸으로 국내진공작전을 펼친 안경신 같은, 줄기차게 항일투쟁을 해온 이들이 더 알려지고 그와 같은 분들의 이름이 교과서에 실리는 게 정상 아닐까.

일제강점기 신문에서 이름이 거의 검색되지 않는 유관순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해방 직후인 1946년이다. 이화학당 출신 두 여성 박인덕(당시 이화여중 교장)과 신봉조의 활동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화학당 출신 가운데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적지 않았고,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알려진 박인덕과 신봉조는 이화학당은 물론 자신들의 친일 행적을 가릴 수 있는 이화학당 출신 애국자를 내세우고자 하였다. 이에 알맞은 인물로 유관순이 있었으며, 이때부터 유관순은 세상에 알려지면서 프랑스를 구한 영웅적인 소녀 잔 다르크(Jeanne d’Arc)에 비유되기조차 하였다. 전기와 소설이 발간되고, 기념 영화가 만들어졌다. 여기에 김활란과 모윤숙을 비롯한 이화학당 출신 친일반민족행위자와 우익 세력 및 기독교 세력이 합세하면서 유관순은 영웅화되었다. 그녀 이야기는 신화가 되어 떠받들어졌다.

유관순이 널리 알려지면서 이화학당은 마치 여성 독립운동가의 산실처럼 여겨지고, 유관순을 앞세운 친일파들은 자신들이 마치 애국자인 양 행세하면서 잘 나가는 만큼 한편으로는 자신의 친일 행적을 가릴 수 있었다. 더불어 유관순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심지어 (이미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과서에 유관순에 관한 서술이나 사진이 들어가 있는데도)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유관순 사진이 빠졌다고 엄청난 항의를 받는 일까지 벌어질 정도가 되었다.

김좌진과 유관순이 펼친 독립운동을 깎아내리거나 헐뜯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김좌진과 유관순 모두 훌륭한 독립운동가이며, 김좌진과 유관순은 당연히 우리가 본받고 기려야 할 인물이다. 다만, 제대로 평가하자는 것이다. 바로 평가하자는 것이요, 역사를 바로 보자는 것이다. 그들만큼 훌륭한 일을 했음에도, 그들보다 엄청난 독립운동을 펼쳤음에도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 일이 더는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다.

평가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역사를 보는 제대로 된 눈을 가져야 한다.

공주 공산성 입구 한쪽 구석에 상대적으로 초라하게 서 있는 ‘애국지사 오동진 선생 추모비’를 보고 있으면 민망하고 억울하기조차 한 심정으로 “과연 이게 제대로 된 세상일까?” 반문하곤 한다. 나는. 오늘도, 아직도, 친일파들이 떵떵거리고 있는 세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