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무장독립투쟁의 중심, '오동진 장군 ' [1]
항일무장독립투쟁의 중심, '오동진 장군 ' [1]
  • 이원구 기자
  • 승인 2021.12.07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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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전병철 작가(전 교사)
오동진 ⓒ출처:한국사데이터베이스
오동진 ⓒ출처:한국사데이터베이스

 

김좌진(金佐鎭), 김동삼(金東三)과 함께 항일무장독립운동 3대 맹장(猛將) 가운데 한 분으로 평가받는 이가 있다. ‘연인원 독립군 14,149명을 지휘하면서 일제 관공서 습격 143회, 일제 관리, 경찰, 밀정(密偵), 친일부호 등 살상 914명’이라는 당시 평안북도 경찰부가 낸 통계가 말해주듯 조국 독립을 위해 항일투쟁에 온몸을 바친 전설적인 독립운동가가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계를 유지하면서 국내진공작전을 비롯한 항일무장투쟁을 적극적으로 펼쳐 일제 기관을 폭파하고 주요 인물을 암살하는 데 힘을 쏟는 가운데 한편으론 만주에 있는 한인(韓人)을 보호하고 그들의 생활 개선에도 노력하여 한국인의 위상과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크게 드높인 항일민족운동가가 있다.

교활한 일제 밀정에 의해 체포되어 재판받는 법정에서 일제 판사와 검사는 물론 법정을 가득 메운 방청객, 친일파 등을 향해 당당하게 “나는 하느님의 지시로 세계평화를 완성하기 위하여 조선독립군 사령(司令; 사령관)이 되었다”라고 호통치고, “너희들이 나를 가둘 수는 있어도 굴복시킬 수는 없다”라며 일본인 재판장을 꾸짖던 항일투사가 있다.

독립운동을 함께했던 동지와 만주 한인들은 물론 적(敵)이었던 일제 경찰과 재판장, 형무소장마저 존경하던 독립운동가, 오늘날 대한민국과 북한 모두로부터 존경받는 항일애국지사가 있다. 바로 오동진(吳東振, 1889~1944)이다.

오동진은 서기 1889년 평북 의주군 광평면 청수동에서 출생하였다. 배일사상이 강한 천품(天稟)을 가졌던 선생은 소년시절부터 일본의 만행에 항거하였으며 서기 1919년 신의주에서 3․1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활약하던 중 체포령이 내려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는 평화적인 시위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으며 오로지 무력으로 일제와 투쟁함으로써 독립이 가능하다고 판단, 이에 무장투쟁을 하기 쉬운 만주에 자리잡았다.

#만주를 근거로 항일무장투쟁, 국내진공작전을 펼치다

만주에 자리잡은 오동진은 1919년 6월 비밀결사 광제청년단(廣濟靑年團)을 조직하고 의용대를 편성해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였으며, 11월 안병찬(安秉瓚) 선생과 같이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을 통합하기 시작하여 각 지역에 조직되어 있던 청년단체를 통합하여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를 조직하고 1920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사부 직할인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를 결성, 제2영장(營長; 사령관)에 취임하여 활동하였으며, 같은 해 대한광복군총영(大韓光復軍總營, 광복군총영)를 조직, 총영장(總營長; 총사령관)을 맡아 일제 기관을 폭파하고 반민족 친일파를 처단하고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 많은 공적을 남기었다.

특히 오동진이 이끄는 대한광복군총영은 1920년 8월 미국 상원의원인 모리스 의원 등 동양시찰단 일행과 가족 70여 명이 24일 서울(당시 경성)에 온다는 정보를 듣고 그들이 방문하는 기간 조선인이 일제에 투쟁하고 있는 사실을 보여주면 우리의 독립 의지가 세계에 알려져 국제 여론이 유리하게 형성되어 조국 독립을 앞당길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에 광복군을 국내에 파견, 중요 시설을 파괴하고 일제 주요 관리를 처단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자주성과 항일 의지를 보여주고자 결의하여 소속 부대를 크게 3개 부대로 나눠 국내에 파견, 평안남도 도청과 평양경찰서, 신의주역, 선천경찰서와 선천군청 등을 파괴하고 일제 관리와 주요 인물을 암살하는 성과를 거둬 일제와 총독부 관리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총독부 폭파를 계획하여 기다리고 있던 서울 임무조는 미국의원단이 서울에 들어오기 3일 전날 밤 일행이 발각․체포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비록 작전은 실패하였지만, 일제에 큰 충격을 주는 것은 물론 국내외에 많은 관심을 끌었다. 아쉽게도 당시 임신한 몸에도 국내진공작전에 참여한 안경신을 비롯한 대원 대부분이 체포되어 재판받았다. 오동진은 잡히지 않았으나 그 책임자로 여겨져 그가 참석하지 않은 궐석 재판에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오동진은 일제와 조선총독부 경찰의 끈질긴 추적을 받으면서도 독립투쟁을 멈추지 않고 오히려 압록강 일대 벽동·삭주·후창·초산·무산 등 경찰주재소와 관공서 습격을 주도하였고, 친일 밀정 제거와 국경 경찰대 공격을 끊임없이 전개하였다

좌우합작을 꾀하고, 한인 생활 개선에도 힘쓰다

만주지역 독립군 활동으로 충격을 받은 일제는 일본군을 만주에 파병하여 독립군은 물론 만주 한인에 대한 대학살을 저질렀다. 이에 적잖은 타격을 받은 독립운동단체가 다시 단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좀 더 효과적으로 펴나가는데 오동진이 큰 역할을 하였다.
 
오동진은 1922년 2월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 통군부)를 조직, 재무부장에 임명되어 군자금 모집 등에 힘썼으며, 이어 1922년 8월 재만대소(在滿大小)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입법․행정․사법을 통할하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조직하였다. 이에 만주에 있는 독립군은 모두가 통의부 소속 군사부의 몇 개 중대로 편성되었고 선생은 본부에서 교통과 재무 양 부장(部長)의 중책으로 독립운동 중 가장 어려움을 한 몸에 떠맡으시고 막대한 군자금 조달에 심혈을 쏟았다.
 
통의부는 오래가지 않아 되지 않아 황제가 다스리는 대한제국을 다시 회복하려는 복벽주의(復辟主義)와 공화정을 추구하는 공화주의(共和主義) 세력 간의 갈등으로 내부 분열이 일어났다. 독립군끼리 서로 갈등․대립하고 있는 독립운동단체를 재정비하는 일은 아주 시급한 과제였다.
 
이에 오동진은 이청천(李靑天)·김동삼(金東三) 등과 협의하여 만주지역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단체를 다시 통합하고자 노력, 1924년 10여 군소 단체를 통합․개편하여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였다. 오동진은 정의부에서 처음 중앙행정위원(집행위원)이 되고, 이어 재무부장이 되어 군자금 조달에 힘을 쏟았으며, 1925년에는 군사부 위원장(군사위원장) 겸 총사령장(총사령관)이 되어 무장투쟁을 지휘, 압록강 국경을 넘나들며 국내진공작전을 활발히 전개하여 일본 경찰관서를 습격, 파괴하였다.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경찰부가 밝힌 통계를 보면, “오동진은 1922년 통의부 시절부터 정의부와 고려혁명당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으로 체포된 1927년까지 연인원 14,149명의 부대원을 지휘하면서 일제 관공서를 143회 습격하여 불태우거나 파괴하고, 일제 관리와 경찰 149명, 일제 밀정, 친일부호 등 765명 총 914명을 처단하였다”고 한다. 이런 무장투쟁으로 오동진은 ‘백두산 호랑이’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김좌진, 김동삼과 함께 ‘3대 맹장’으로 불리었다. 오동진 장군은 홍범도 장군이나 김좌진 장군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 1920년대 항일무장투쟁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 가운데 한 분이었다.
 
1925년 조선공산당이 설립되어 1926년에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설치되는 등 만주에도 사회주의가 퍼져 나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좌우합작으로 통일전선을 구축하여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오동진은 1926년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조직․창당하였다. 이처럼 오동진은 좌익계열까지도 독립운동전선으로 흡수․통합시키고 이의 군사위원장과 사령관을 겸임하여 과감무쌍한 활약을 하였다.
또한, 오동진은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한편으론 만주지방 한인 생활 개선을 위해서 농촌 개발과 농민의 경제적 지위 향상, 교육 및 보건·위생 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26년 정의부 간부들과 함께 북만주 반석현 지방에 농업을 경영할 목적으로 유한농업공사(有限農業公司)를 설립하였으며, 1927년에는 안창호와 양기탁이 추진하던 재만동포(在滿同胞) 생활개선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조직하여 만주지방 한국인 교포 200만 명의 생활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다.
 
#감옥에서도 단식투쟁, 항일투쟁을 멈추지 않다.
 
농민호조사를 중심으로 오동진이 만주 한인 생활 개선에 힘쓰고 있을 무렵 그에게 현상금 10만 원(요즘 화폐 가치로 계산하면 약 10억 원 정도)이 걸린 가운데 그는 일본 경찰과 밀정의 끈질긴 추적을 받았다. 결국, 일제의 치밀한 공작과 김종원(金宗源)의 밀고(密告)로 붙잡히게 된다. 당시 계속된 국내진격작전과 의혈투쟁에 이어 한인 사회의 경제적 안정을 위해 농민호조사를 운영하느라 많은 자금이 필요하였지만, 국내외 동포들이 보내는 성금과 한인지역 후원금만으로는 독립군 자금과 영농자금이 턱없이 부족하였다. 독립군은 굶기를 밥먹듯이 하고 농민호조사는 운영난을 겪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옛 동지 김종원이 찾아와 평안북도 삼성금광(三成金鑛) 주인이자 친일부호 최창학(崔昌學)을 만나 그로부터 군자금을 얻어 보자는 제안을 오동진에게 하였다. 오동진은 동료의 말을 믿고 최창학을 만나기 위해 1927년 12월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해 김종원과 함께 기차를 탔다가 역에 잠복해 있던 신의주 경찰과 신의주 고등계 악질 형사 김덕기(金悳基)에게 체포되어 신의주로 호송되었다. 일제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파놓은 함정에 빠진 것이었다. 김종원은 동료가 아니라 일본 경찰의 밀정이었다.

오동진은 조사나 재판 과정에서 자신이 지휘한 무장투쟁을 당당히 인정하였으며, 고문을 당하면서도 동지와 부하들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때론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거나 1929년 11월부터 33일간 단식을 하는 등 수사에 협조하지 않았다. 재판을 거부하기도 하였으며, 그를 변호하는 변호사가 많았음에도 오동진은 재판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자 변호사마저 거부하기도 하였다.

오동진 재판 광경(1931.06.17. 신의주지방법원). 법정 밖에 몰려든 군중(위), 수갑을 찬 채 법정에서 노래 부르는 오동진(원 안), 가족과 동지들(아래)=출처 동아일보(1931.06.19. 2면)
오동진 재판 광경(1931.06.17. 신의주지방법원). 법정 밖에 몰려든 군중(위), 수갑을 찬 채 법정에서 노래 부르는 오동진(원 안), 가족과 동지들(아래)=출처 동아일보(1931.06.19. 2면)

 

공판 때마다 소란을 일으켜 여러 차례 공판을 폐정시킨 오동진은 1931년 12월 14일 신의주형무소에서 경성 서대문형무소로 이송(移送)되어 경성제국대학교 구보(久保) 박사로부터 정신감정을 받아 ‘형무소정신병(刑務所精神病)’이라는 희한한 병명(病名)을 얻어 1932년 2월 19일 다시 신의주형무소로 돌아왔다.

1932년 3월 2일 열린 재판은 일반인 방청이 금지되었음에도 많은 사람이 방청하기 위해 신의주지방법원에 몰려들었다. 강제로 재판정에 서게 된 오동진은 재판장석에 뛰어올라서 “여기는 너희가 앉을 자리가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앉을 자리다. 너희들과 말하고 싶지 않다” 하며 재판장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형무소에 구속하고 재판할 수는 없다”는 내용이 담긴 긴 선언서를 제출하였다. 또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셋째 아들이니 이 세상에서 판결을 받을 필요가 없다” 하며 심리를 거절하고, 변호사 변호를 받을 하등 필요도 없다며 재판을 거부하였다. 다섯 명 변호사가 사임하자 재판소 측에서는 이희적․최창조․박영휘 세 변호사를 관선(官選) 변호사로 정하고 오동진을 퇴정시킨 채 재판을 진행, 검사는 무기징역을 구형하였다.
3월 9일 재판에서도 오동진은 “하나님의 아들을 누가 재판하느냐” “조선 독립군을 처벌할 사람이 누구냐”며 고함을 높이는 가운데 재판장은 ‘제령(制令) 7호 위반, 치안유지법 위반, 강도·살인·방화’ 등의 죄명으로 무기징역을 언도(言渡)․확정하였다. 오동진에 관한 재판 서류는 기미년 이래 ‘조선독립운동사’라고도 볼 수 있을 정도로 권 수(卷數)로는 60여 권, 높이로는 약 6척(尺: 약 30.3cm)이 넘어 신의주지방법원이 생긴 이래 처음이라 하며, 이것을 운반하는데 다섯․여섯 명의 급사(給仕; 심부름꾼)가 힘을 들였다 한다.

신의주역에서 출발, 평양역에 도착하여 만세 부르는 오동진(아래)과 그가 탄 자동차를 에워싼 군중(위)=출처 동아일보(1932.03.22. 2면)
신의주역에서 출발, 평양역에 도착하여 만세 부르는 오동진(아래)과 그가 탄 자동차를 에워싼 군중(위)=출처 동아일보(1932.03.22. 2면)

 

오동진이 평양으로 이감된 후 평양복심법원은 5월 10일로 공판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오동진이 “하나님 아들인 사람이 사람인 재판장에게 심리를 절대로 당할 수 없고, 따라서 변호사의 변론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며 재판을 거부하자 재판은 연기되었다. 겨우 1932년 6월 1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도 오동진은 재판장의 심리를 거절하며 “이 재판에는 복종할 수 없다”라고 하거나 “너희들을 상대할 필요가 없다”는 등 호통치고 독립가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런 그를 여전히 ‘형무소정신병자’라고 하였으며, 결국 재판은 서면으로만 진행된 채 무기징역이 구형되었다. 이어 1932년 6월 21일 열린 재판에서 재판장은 예심과 마찬가지로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평양복심법원에서 내린 죄명은 ‘폭발물 취체벌칙(取締罰則) 위반, 살인 교사(敎唆), 치안유지법 위반’ 세 가지였다. 오동진은 일제가 하는 재판은 더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여 6월 22일 상고를 포기하였다. 이로써 무기징역이 확정되었으며, 오동진은 당시 주로 장기수를 수용하던 경성형무소(서울 마포구 공덕동)로 이감되었다.

1932년 7월 7일 일제강점기 악명을 떨치던 경성형무소로 이감된 오동진은 1934년 6월 11일부터 48일 동안 제2차 단식을 하였으며, 그런 가운데 종교(기독교)에 관한 논문, 원고지 600매를 쉬지 않고 계속 써왔다. 당시 일본인 형무소장 횡산(橫山)은 “오동진이 단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형무소에 대해 무슨 불평을 품고 시위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으로 어떠한 청신한 경험을 얻고자 하는 것으로 짐작합니다. 먹을 밥은 하루 세 끼씩 언제든지 준비해 있으니까 그가 먹고 싶어 할 때는 언제라도 먹일 작정입니다”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그의 단식 또한 투쟁이었다. 옥중에서 오동진이 투쟁할 때 일제는 그를 빛이 들어오지 않는 깜깜한 방에 100일 동안 가둬두기도 하였다. 주먹밥 하나 들어갈 정도로 작은 구멍이 있는 징벌방에서 100일이 지난 뒤 미치지 않고 정정한 모습으로 오동진이 나오자 일본인 형무소장은 그를 ‘가미사마(かみさま)’라고 불렀다고 한다. 가미사마는 아주 뛰어난 사람이나 신(神)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오동진은 일본인 간수 사이에서 신(神)으로 불리며 존경받았다. 7년간의 형무소 생활로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오동진이 물만 먹으며 48일 동안 단식을 하자 모두 그의 정신력에 감동하였으며, 일본인 형무소장조차 그와 이야기를 나눌 때는 경례를 하며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