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분의 충절, 정지산의 충효 기리는 제향 올려
정분의 충절, 정지산의 충효 기리는 제향 올려
  • 김종술.제미영 기자
  • 승인 2010.04.16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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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의 문신 정분(鄭笨, ?~1454)의 충절과 정지산(鄭之産, 1423~1469)의 충효를 기리는 제향이 16일 오전 11시 공주시 사곡면 호계리에 위치한 충효사에서 거행됐다.

엄숙하게 거행된 이 날 제향에는 이준원 공주시장을 비롯한 유림과 후손 등 200 여명이 참석했다.

정분이 명정받기까지의 과정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746년(영조 22) 복관(復官)된 이후 1758년(영조 34)에 ‘충장(忠莊)’이라는 시호를 받고, 1786년(정조 10)에는 장흥의 충렬사, 1791년(정조 15)에는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는 등 일련의 신원과 복관이 이루어지는 과정 속에서 1804년(순조 4)에 명정을 받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정지산은 1905년에 공주 유생 장세오(張世五) 등이 통문을 돌리고 진사 이병홍(李秉洪)을 비롯한 충남유생 304인이 관찰사에게 등장을 올려 자헌대부 내부대신(資憲大夫 內部大臣)으로 증직됨에 동시에 충신·효자로 명정을 받게 되었다.

제향을 올린 충효사는 우의정으로 단종을 보필하다가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사사(賜死)된 정분과 그의 양자 정지산을 배향하는 사당으로서 1808년(순조 8)에 건립되었으며 1924년 제각(祭閣)인 경모재(敬慕齋)가 지어졌고, 1931년 중수하면서 부여의 외산(外山)에서 발견된 정분의 영정을 모사하여 봉안하였다.

1982년 정분의 충절과 정지산의 효행을 기린다는 뜻에서 충효사라고 명명하였고, 공주시에서 사당 전방에 정려(旌閭)를 짓고 사당에 걸려 있던 명정을 이전하였다. 정려는 1997년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제18호로 지정되었다.

1994년 공주 지역의 유림(儒林)과 후손들이 사우와 삼문(三門)을 세워 고로서원(古老書院)이라 명명하고 정분을 주향으로 하여 정지산을 함께 배향하고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구조이고, 30칸의 담장이 둘러져 있다. 삼문에는 의재문(義在門), 사당에는 충효사(忠孝祠) 현판이 걸려 있으며 사당 안의 왼쪽에 정분의 영정이 있고, 중앙에 정분과 정지산의 신위가 봉안되어 있다.

현재는 사곡면의 진주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고로사(古老寺)라는 절을 고쳐 재실(齋室)로 이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