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김승규 忠孝 旌閭
김종서·김승규 忠孝 旌閭
  • 제미영 기자
  • 승인 2010.04.02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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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정난癸酉靖難 때 희생된 김종서(金宗瑞, 1390~1453)의 충절과 그의 아들 김승규(金承珪, ?~1453)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려로 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 대교리 산45번지 김종서 장군 묘 입구에 위치해 있다.

이 정려는 1747년(영조 23) 김승규의 명정이, 1804년(순조 4) 김종서의 명정이 내려진 뒤 세워졌는데, 지금의 정려는 공주시에서 시행한 김종서 묘역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후손인 김기원이 서산에 보관하고 있던 현판을 옮겨와 1981년에 건립한 것이다.

김종서는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에서 도총제를 지낸 아버지 김추金墜와 대사헌 배규裵規의 딸 성주 배씨 사이의 3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 시호는 충익忠翼이며, 1405년(태종 5)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1415년 상서원 직장尙書院 直長을 지냈고, 1419년(세종 1) 3월 행대감찰行臺監察로서 충청도에 파견되어 진휼 상황을 조사하였다. 특히 세종의 신임이 두터웠고 1433년 12월 함길도 관찰사가 된 뒤 7~8년간 북변에서 6진을 개척하여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장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단종이 즉위한 뒤 의정부대신들의 권한은 왕권을 압도할 정도였으며 학문과 지략에 무인적 기상을 갖춘 김종서의 위세는 당시 ‘대호大虎’라는 별명을 듣기에 족하였다.

▲ 김종서.김승규 충효 정려

지용을 겸비한 명신이었으나, 단종이 12세로 왕위에 오르자 좌의정으로서 어린 왕을 보필하다가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이 야망을 실현하는데 가장 문제가 되는 인물로 지목되어 결국 계유정난 때에 수양대군에 의해 1453년(단종 1)에 두 아들과 함께 죽음을 당하고 대역모반죄라는 누명까지 쓰고 효시梟示됨으로써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사후 김종서는 1456년(세조 2년)동학사에 있는 숙모전에 전신인 초혼각 동무에 그의 형인 종한(宗漢)과 함께 배양되었다 1746년(영조 22) 복관되었다.

이후 1791년(정조 15년)에는 장릉 배식단配食端에, 1797년 공주 요당서사蓼塘書祠에 배양되었고 1808년(순조 8)에는 부조묘不?之典를 받았다.

김종서는 세종 때 함길도도관찰사咸吉道道觀察使가 되어 야인野人들의 궁경침입을 격퇴하고 6진六鎭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한국의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또한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世宗實錄》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편찬하였다.

김승규(金承珪, ?~1453)는 김종서의 첫째 아들로 1453년 계유정난 때 아버지인 김종서가 목숨이 위급해지자 몸으로 가로막다가 죽었다.

1791년 (정조 15) 김종서와 함께 장릉莊陵 배식단配食壇에 배향되었다.
1447년 지평, 1449년 형조정랑, 호군護軍, 1452년 사복소윤司僕少尹, 1453년 수전농사윤守典農寺尹, 전농윤典農尹, 지형조사知形曹事를 지냈으며, 1450년과 14521년에는 의주성 쌓는 것을 감독하였으며 관직은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순천김씨가 공주에 세거하게 된 것은 지평을 지낸 김종서의 조부 태영台泳부터이다.
순천김씨가 공주에 이거하게 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고, 다만 후손들의 제보에 의하면 본래 순천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순천과 서울을 왕래하기가 힘들어 그 중간정도에 집을 마련한 곳이 공주 요당으로 이때부터 이미 공주와 인연을 맺고 있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세종실록’ 7년(1439) 2월 15일 기사의 ‘김종서의 아내가 공주에 살면서 오랜 질병으로 고생하니 어육을 내려 주라’는 것이나 ‘단종실록’ 즉위년 (1452)12월 15일 기사의 '김종서가 장차 충청도 공주에 가서 성묘하고자 대궐에 나아가 하직하니 음식을 대접하고 마장馬粧 1부를 하사하였다는 내용, ‘단종실록’ 1년(1453)10월 16일 기사의 계유정난 이후 ‘김종서의 아들 김승벽이 공주의 농장 등지에 숨어있다’는 등의 기록으로 보아 공주지역에 김종서의 집과 농장 그리고 선대 묘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묘역은 약 70㎡로, 담장이 있고 3문으로 되어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다. 무덤 앞에 있는 오래된 묘비는 1748년(영조 24)에 세운 것이고, 1963년 새로 건립한 묘비는 높이 3m, 너비 50cm이다.

정려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사면에 홍살을 둘렀다. 내부에 걸린 김종서의 명정 현판은 가로 219㎝, 세로 36㎝이며,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겸영경연 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증시충익공 김종서지문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 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贈諡忠翼公 金宗瑞之門’이라고 새겨져 있다.

김승규의 명정 현판은 같은 크기에 ‘효자통정대부병조참의 김승규지문孝子通政大夫兵曹參議 金承珪之門’이라고 새겨져 있다. 현판 뒷면에는 각각 복관復官과 시호, 명정 등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