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를 스승으로 삼다(以吏爲師)
관리를 스승으로 삼다(以吏爲師)
  • 고주환
  • 승인 2019.07.07 16:33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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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주환
고주환 ⓒ백제뉴스
고주환 ⓒ백제뉴스

 

관학이란 무엇인가?

관학은 현실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이다. 정해진 목적과 규격에 맞추어 가는 수성(守城)과 이용(利用)의 학문이다. 그러므로 관학은 현실을 지배하는 수단이다. 어찌 나쁘기만 하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관학 일변도의 사회는 미래가 없다. 현실밖에 없기 때문이다.

관학이 지배하는 사회는 관리가 스승이다. 다시 말하면 정치권력이 스승인 셈이다. 중국 역사상 초유의 사태인 분서갱유(焚書坑儒 : 책을 불 지르고 선비를 생매장한 사건)는 공맹의 유학과 제자백가의 사상과 학문을 탄압한 것으로 관리를 스승으로 삼은 전형적인 사학 말살 초유의 역사적 사건이다.

사학이란 무엇인가?

사학은 진리를 추구한다. 자율과 창의를 바탕으로 현실에 매몰된 비리와 부정을 비판하며 보다 높은 경지, 넓은 영역, 영원한 미래를 추구한다. 그러기에 때로는 권력에 맞서 쓰러지기도 하지만 어찌 한 시대를 지배하는 권력이 진리를 막을 수 있겠는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 사학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맹이 지위를 얻지 못했으며 조선시대 정도전, 조광조, 이이, 이유태 등이 현실 정치에서 버림받게 된 것이다.

일제치하에도 사학은 존재했으니,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비록 일제의 폭력과 탄압이 거세다 해도 우리나라는 우리가 다스려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가 인류에 보편적 가치인 이상 어떠한 권력과 탄압도 이 진리를 바꿀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불행하게도 사학은 없고 사립만 존재한다.

행정과 자본이 학문을 제어하고 법이라는 미명하에 교수와 교사를 일정한 틀로 가두어 버린다. 그러니 스승이 없다. 단지 행정관리와 자본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 이런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을까? 참담한 실정이다.

선비는 재야에서 나온다. 규정된 틀 안에서는 진정한 학자인 선비가 나올 수 없다. 조선을 거쳐 일제치하에도 있었던 사학이 이제 비로 쓸어내듯이 사라졌다. 심지어 사립(사학?)재벌이 존재하는 판이니 교육이 돈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의 교육은 시험문제와 취업의 도구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교육 또한 이권쟁탈의 각축장으로 변모한 것이다. 어찌 슬프지 않으랴.

도는 주인이고 정치는 종이다(道主政從). 도를 밝혀 현재의 폐단을 바로잡아야 할 학문이 없다. 도는 산속에 있는 것도 아니며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에 의존하여 크고 성장하는 것이다(人能弘道 非道弘人). 도가 없는 세상은 힘이 지배한다. 오늘날의 힘은 무엇인가? 권력과 자본이다. 힘이 지배하는 사회는 쟁탈의 풍속이 지배한다. 다투어 서로 빼앗는 시대, 중국의 전국시대가 땅따먹기 시대였다면 오늘의 시대는 권력과 자본의 쟁탈시대이다. 이러한 시대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어찌 경쟁이 나쁘기만 할까? 경쟁의 룰이, 경쟁의 조건이 정의롭지 못하기에 문제인 것이다. 초중등과 대학의 교육이 통제를 받는다면 이미 우리 사회는 헌법에 명시한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법과 제도에 의해서 일정부분 통제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의 자유, 학문의 자유, 선택의 자유를 국가가 통제할 때, 이미 교육과 학문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국가수준의 기본 틀은 국가교육위원회에서 정할 수 있다. 그러나 교사와 교수의 자격, 교육과정의 편성 및 운영 등에 대하여는 단위학교의 자율에 맡기고 어느 학교를 택할 것인가는 국민의 선택과 자유에 맡겨야 한다. 따라서 학교법인(국·공·사립)에 교육예산을 지원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의 학문의 자유를 제어하고 억압하는 것이다. 단위학교와 국민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겨야 한다.

오늘날 하나의 유행처럼 퍼지고 있는 마을교육공동체 또한 교육행정의 주도이다. 이 또한 성공을 위해서는 예산의 수립과 집행을 지난날처럼 교육인적자원부가 주관한다면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난 한국교육현대사에서 교육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한 장본인이 그들이며 그들이 수행한 것 중 성공한 것이 없기 때문이며 학문의 자유를 제도적 틀로 억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문과 교육이 정치와 관리가 제어하면 망친다는 역사적 교훈은 고려시대 최초의 사학이었던 최충사학의 실패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결국 최충사학은 입시학원(과거시험)으로 전락했으며 고려는 무신의 난을 거쳐 무신이 조선을 세우는 역사를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불행한 일이다.

정치와 관리가 학문과 예술, 교육을 제어하면 그들이 짜놓은 틀 안에서만 운용하기 때문에 자유와 창의를 토대로 추구하는 교육 본연의 속성을 제어하기 때문에 변질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선미(眞善美)는 그 대표적 사례가 될 것이다. 진(眞)은 철학의 최고 가치이며 선(善)은 도덕의 최고 가치이며 미(美)는 예술의 최고 가치이다. 또 진선미는 종합적인 것으로서, 진은 선이며 미이며 선은 진이며 미이며 미 또한 진이며 선인 것이다. 이러한 진선미가 정치와 관리와 자본의 제어에 의해 하나의 상업주의 상징으로 전락한 것이다.

헌법이 하나의 명문화된 문서에 불과하다면 진선미의 철학적 가치는 헌법의 규정을 실현하기 위한 소프트웨어가 될 것이다. 이 소프트웨어의 발전 없이는 헌법의 규정은 하나의 문서로 존재할 뿐이다. 다시 말하면 이상과 현실의 괴리이며 따로 국밥인 셈이다.

모처럼 서구의 교육사상과 이론이 아닌 진정으로 국민과 함께하는 마을교육공동체 사업의 성공을 위해서는 정치와 행정의 간섭과 제어가 없는 순수한 민간의 동력을 자발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법적 토대와 행정의 위탁이 이루어져 자율과 창의가 모태가 되기를 기대한다.

/(사)공주시마을공동체네트워크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