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풍경
어떤 풍경
  • 육복수/시인
  • 승인 2007.07.03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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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시작된다는 일기예보가 있은 후, 곧장 무섭게 비가 내리더니 밭작물은 거의 해갈이 되었고, 작년에 심어서 몸살을 하는지 비실거리던 감나무도 이파리를 빠듯이 들어 올렸다. 가뭄에 목이 타서 바직거리던 나무들과 숲들에서 굴렁굴렁 물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고, 낮게 엎드려서 이웃 산들과 소곤거리는 능선 아래 작은 계곡에서는 꿈결같은 운무가 피어 오르며 시골 작은 마을은 빗소리만 들리는 고즈늑함에 쌓인다.

비가 내리면 나는 좋다. 왜, 비를 핑계로 할 일을 미룰 수 있으니까.

그러나 비라는 것이 꼭 밤이나 새벽에는 줄기차게 내리다가도 날이 새면 간간하게 바뀌어서 내쳐 놀기도 그렇고 일을 하기도 그런, 애매하기 그지없이 내리는 통에 실금실금 아내의 눈치를 보다가 선수를 치자싶어 ‘아이구 할 일도 많은데 비가 왜이키온디야 참나, 헐 수 없지 부침게나 부쳐’ 하는데 아내가 대뜸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먼 소리여, 잔듸밭에 풀은, 호박넝쿨, 머루넝쿨은?’ 이라는 말에 비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있나.

올라면 낮에도 지대로 오든지 안 올라면 말든지. 아내의 등살에 뭐 끌려가듯 끌려가면서도 성질이 나서, 날 개이면 하면 되지 않냐고 말을 해도 예의 그 가라앉은 목소리로 날 개이면 할 일 더 많어,라는 소리에는 할 말이 없어 풀을 뽑는다.

물 머금은 풀은 성질 난 사람이 뽑기에는 딱이다. 마른 날 뽑을 때는 그렇게도 안 뽑히더니 술술 뿌리까지 잘도 뽑힌다.

한참을 그렇게 뽑다가는 또 잘 뽑히는 것이 짜증이 난다. 어짜피 뽑힐거면 아무 때나 뽑혀주지 하면서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누구 벌초하듯이 잡풀을 뽑아서 휘익휘익 집어던지니 옆에 있던 아내가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집으로 들어가더니 한참 뒤에 부침게와 막걸리를 소반에 받쳐서 가져오고 있는게 아닌가.

오메 반가운거 참말로 반가운 거, ‘목 말라서 물 좀 달라고 할라고 했는데’라는 내 말에 아내는 듣는 둥 마는 둥 잔에다가 술을 따라주더니 부침게를 젓가락으로 주우욱 찢어 간장을 푹 찍어서 입에다 넣어 주네. 술 들어가서 짜증 안 풀리고 힘 안 생기는 경우가 있던가.

아내와 주거니 받거니를 하면서 우리의 도마 위에 세상사 인간사를 울려놓고, 찧고빻고 썰기를 거듭하다 얼큰해질 무렵, 창고 위로 끈을 엮어서 호박넝쿨을 잡아주고, 아내의 작업실 ‘수숙산방’ 입구 처마 밑으로 머루넝쿨을 마끈으로 유인해 올려놓고나니 늦은 오후다. 성질이 나서 버둥거려도 짜증이 나서 뺀질거려도 할 것은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감당이 안되는 것이 시골생활이다.

비는 설핏해지고 안개가 내려와 응드리응드리 서성거리면 외딴집이 안개에 묻히고 평상에 앉아 바라보는 풍경과 사람살이와 아내의 옆모습이 애닯다.

또 이렇게 여름날의 하루가 간다.

산철쭉의 말

지난 봄
산에서 캐온 철쭉이
비들비들 죽어가고 있다
병든 것도 아니고
양분을 주지 않은 것도 아니고
마당 가장자리 양지쪽에 예쁘게 심었는데
오늘 아침 누른 잎 마지막으로 떨구며
산을 캐오라 하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