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잘라 피 먹이며 간호
손가락 잘라 피 먹이며 간호
  • 제미영 기자
  • 승인 2009.12.31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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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이면주 정려(孝子 李勉疇 旌閭)

효자 이면주 정려(孝子 李勉疇 旌閭)는 전주이씨 이면주(李勉疇, 1818~1871))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것으로 1905년(고종 42)에 명정을 받아, 이듬해인 1906년(고종 43)에 세워졌다.

이면주가 1905년 효자로 명정을 받을 당시의 입안문(立案文)을 보면 충청도 내 유생 김태현(金台鉉) 등이 이면주의 효행 행적을 조정에 알렸고, 예식원장례경(禮式院掌禮卿) 남정철(南廷哲)이 정려를 내리자고 주청하여 1905년 명정을 받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임금이 정문을 내리도록 비답한 내용과 정문을 세울 때 재목과 목수를 관청에서 제공하고 그 자손들의 환곡 및 제반 잡역 일체를 면제해 주도록 조치한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면주는 의당면 양촌에서 태어났으며 효심이 지극하여 항시 부모님을 섬기는데 정성을 다했다. 아버지가 중한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병의 경중을 알아보기 위해 변을 맛보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는 등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다.

하루는 약을 구하기 위하여 몇 십리를 헤매다가 피곤하여 잠깐 눈을 부치고 있는데 꿈속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약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데 어째서 멀리만 뛰어 다니느냐고 하여 이면주가 “약이 가까운 곳에 있다면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니 “너의 아버지 병에는 꿩밖에 다른 약이 없느니라”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다음날 동이 틀 무렵 꿩을 잡기 위해 방문을 열고 나가는 데 무엇인가 문에 탁하고 부딪쳐 마당을 보니 꿩 한 마리가 파닥거리고 있어서 그것을 잡으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머리위로 또 다른 꿩이 집기 등에 부딪쳐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하늘이 아버지를 돕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 꿩을 잡아 약을 해서 아버지께 드리는 병환이 바로 낳았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효자 이면주의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무형(茂亨, 1793~1861)과 결성 장 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공주지역에 세거하고 있는 전주 이 씨들은 덕천군의 후손들로 이면주는 정종의 10남인 덕천군의 13세손이다.

전주 이 씨들이 공주에 터를 잡게 된 것은 상산군의 장남 평양령 요년(堯年)의 아들인 진주목사 이몽경(李夢慶, 1538~1624)부터 였다.

이들은 원래 양주 지역에 세거하였으나 임진왜란 당시 이몽경이 난을 피해 낙향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공주시 의당면 용암리 154-1번지에 세워진 효자 이면주 정려는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유형 제30호로 지정됐다.

효자 이민주 정려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정려의 내부에는 ‘효자증구품종사랑중학교교관 이면주 지문(孝子贈九品從仕郞中學校敎官李勉疇之門)’ 이라는 명정 현판이 걸려 있고, ‘효행정려기(孝行旌閭記)’와 정려비가 있으며, 이면주의 묘는 의당면 용암리 양촌 뒷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