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에게 물려간 시아버지 구출
호랑이에게 물려간 시아버지 구출
  • 제미영 기자
  • 승인 2009.12.02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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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부 창녕성씨 정려 건립으로 효행 기려

효부 성씨는 시아버지가 늙어 병에 걸리자 온갖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다. 특히 시아버지가 몸에 이가 들끓어 잠을 이루지 못하자 자기 머리에 기름을 발라 이가 자신의 머리로 옮아오게 한 후 빗으로 털어 없애는 등 병든 시아버지를 극진히 모셔 효부라고 칭송 받았다고 전해진다.

▲ 공주시 신기동에 지어진 효부 성씨 정려비각

또, 남편이 출타하고 없는 사이 효지산의 호랑이가 내려와 시아버지를 물고 가버리자 성씨는 왼손에 등불을 들고 쫓아가서 자신을 대신 잡아가라고 호통을 쳤다. 그 소리에 놀라 호랑이가 사나운 짓을 중지하고 가버리자 성씨는 시아버지를 업고 무사히 귀가했다. 그러나 일주일 후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정성을 다해 시묘살이를 했다. 이 일화는 ‘충효등록’을 비롯해 ‘공산지’, ‘호서읍지’, ‘금고실기’, ‘조선환여승람’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또 다른 일화는 성씨의 시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갔다가 그 상처로 인하여 병을 얻어 중태에 빠지자 성씨가 함정을 만들어 놓고 기다리다 삼일 후에 함정에 빠진 호랑이를 잡아 죽이고, 그 한 달 후에 시아버지가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 효부 성씨 비
손의 제보에 의하면 시아버지를 물고 갔던 호랑이가 살던 효지산은 원래 능암사 뒷산이라 불렸는데 성씨의 효행이 알려지면서 효지산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효부 오몽렬 처 창녕 성씨 정려(孝婦 吳夢烈 妻 昌寧成氏 旌閭)는 공주시 신기동 647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유형 제9호로 효부 창녕 성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695년(숙종 21)에 명정을 받아 11년 뒤인 1706년에 건립됐다. 그 후 두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으며, 140여 년이 흐른 1850년대에 이르러 퇴락한 정려를 후손 오시영(吳始英) 등이 중수했고, ‘사적기’를 추가, 보완하였다.

가문이 영세해 훼손된 정려를 돌보지 못하다가 후손 오창선(吳昌先)이 기와 수백 매를 기증하고, 오몽렬의 11세손 오석우(吳錫禹)가 자금을 내어 100여 년 후인 1958년에 다시 중수했다.

효부 성씨는 본관이 창녕으로 참봉 성언홍(成彦弘)의 딸로 어렸을 때부터 성격이 온화하였으며 오몽렬과 혼인하여 슬하에 아들 오복립(吳復立)을 두었다.

효부성씨 정려비각은 보성 오씨의 사족 활동을 보여주는 자료다.
정려가 위치한 신기동은 보성 오씨 집성촌으로 보성 오씨가 이 지역에 살게 된 것은 오몽렬의 증조부인 오효창(吳孝昌)이 충북 문의면에서 이주하면서 부터라고 전해지긴 하지만 이러한 입향과 관련한 사실은 족보나 묘비문 등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오몽렬의 아들인 오복립이 공주향고 청금록에 기록되어 있고 성씨가 명정을 받은 사실과 오몽렬의 현손 오명채가 급복(1713년)과 증직(1771년)을 받은 사실이 집안 문서와 정려 중수기 등에 기록된 것을 토대로 보면 조선 후기에 보성오씨가 이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유적인 효부성씨 정려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화강암 주춧돌에 원형의 기둥을 세웠고, 사방에 홍살을 둘렀으며 방풍막이 있다. 건물 중앙에는 효부성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세운 화강암의 호패형 비석 1기가 있다.

비석 앞면에는 정언 벼슬을 지낸 오자화(吳子華)의 7대손인 오몽렬의 처 효부 성씨가 살던 마을임을 적었고, 효부 성씨가 정승 성준득의 후손인 참봉 성언홍(成彦弘)의 딸임을 기록하였다.

뒷면에는 증손인 오덕망(吳德望), 오덕성(吳德成), 오덕형(吳德亨)이 주도해 비석을 건립한 사실을 적었다. 건물 안 뒤쪽에는 창녕성씨의 사적을 기록한 ‘사적기’가 걸려 있고, 왼쪽에는 1958년에 정려를 중수한 사실을 기록한 ‘중수기’가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