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현서원(忠賢書院)
충현서원(忠賢書院)
  • 제미영 기자
  • 승인 2009.10.29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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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381번지에 위치한 충현서원은 충청남도에서 최초로 세워진 서원으로 고청(孤靑) 서기(徐起, 1523~1591)에 의해 건립됐다.

서기는 홍성에서 태어나 화담 서경덕의 문인인 토정 이지함과 한훤당 김굉필의 학통을 이은 이소재, 이중호에게서 성리학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고 노년기에 공주 공암에 정착 69세에 죽기까지 19년간을 살면서 많은 제자들을 가르쳐 공주의 사림문화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러한 시기인 1581년(선조 14년)에 그의 가르침을 받고 있던 제자들이 주도하고 당시 공주목사로 와 있던 조간(草澗) 권문해(權文海)가 쌀과 콩 50여 휘(곡식의 계량단위 1휘는 10멸)를 재정 지원하여 서기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던 이곳에 서원을 세웠다.

창설당시의 공암서원에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중국의 주자(朱子)가 중앙에 모셔지고, 공주의 향현(鄕賢)인 석탄(石灘) 이존오(李存吾)·한재(寒齋) 이목(李穆)·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이 제향되었다.

공암서원은 서기가 죽은 다음해에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폐허가 된 것을 1610년(광해군 2)에 중수했다.
이때 중수를 주도한 인물로는 서기의 문인들로 의금부 도사를 지낸 박로·박희성·박희철 등이 함께 참여했으며 이들은 공주향교 ‘청금록’에 등재되어 있는 공주의 사족들이다.

공암서원이 충현(忠賢)이라는 사액을 받은 것은 중수된 지 14년 만인 1624년(인조 2)이며, 이듬해 사당을 중건하였고 1790년(정조 14)에 대대적 보수를 거쳐 1871년(고종 8)흥성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당시 주자의 영정은 공주향교 존경각에 봉안되었다.

서원이 철폐된 뒤 이 지역 유림들은 1891년(고종 28)에 단을 설치하여 제향인들의 넋을 기렸고, 다음해에 주자 영정을 찾아와 연정(蓮亭)을 봉안하였다.

1917년에는 단에 제향을 드리기 시작했으며 1925년 옛터에 사우를 중건하고 주자영정을 북벽정 위에 봉안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후 충현서원은 1969년에 사단법인이 결성되어 이사회를 통한 운영을 하게 되었고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0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1989년 강당 중건, 1994년에는 관리사가 신축되었다.

충현서원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사당이 복원되면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기 전에는 사당·신문·강당·전사실·직사·홍전문 등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 모습이 어떠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고 현재는 사당과 신문(삼문), 강당, 수직사가 복원되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전면열은 툇간으로 하고 후면 2열은 내부공간으로 만들어 졌으며, 강당은 1989년에 중건된 것으로 신문은 정면 3칸의 솟을 삼문형식이다.

충현서원 입구 정면 우측에는 충현서원 사적비(忠賢書院 事蹟碑), 좌측에는 충현서원사실병우암송선생추향기가 있고 사적비 앞에 하마비가 있으며 서기의 묘와 묘비는 고청봉의 동쪽 사면 중턱에 있다.

서원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100m 떨어진 위치에 고청 서기가 처음 터를 잡아 강학하던 연정과 서기가 즐겨 산책하였다는 연지가 있다.

서원 입구에 있는 2개의 비는 모두 보주를 얹은 팔작지붕형의 비개와 방형대석을 가진 동일 양식의 비석이다.

대원군에 의해 훼철되기 이전 충현서원 배향인물은 주자를 주벽으로 하고 석탄 이존오·한재 이목·동주 성제원·중봉 조헌·사계 김장생·동춘당 송준길·우암 송시열 등 이었으며, 서기가 별사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1925년에 사우가 중건되면서 별사되었던 고청 서기도 향현 7위의 위패와 함께 배양되어 있으며 제향은 일 년에 두 번, 음력 4월과 10월의 중정일(中丁日)에 행해진다.

충현서원은 공주와 지역의 사림 형성 과정이나 사림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