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식민지청년의 죽음
어느 식민지청년의 죽음
  • 김정섭
  • 승인 2017.12.04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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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김정섭
© 백제뉴스

애국지사 이철하 선생을 기리며

이철하 이름 석자를 알게 된 것은 공주대 지수걸 교수의 [한국의 근대와 공주사람들]이라는 책에서였습니다. 공주고등학교의 전신인 공주고등보통학교(공주고보)에 다닐 때 항일 학생운동을 한 분입니다. 제가 공주고 2학년이던 1982년에 펴낸 [공주고등학교 60년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작년에 제가 [인물로 본 공주 역사이야기] 책을 낼 때 ‘공주의 항일운동 지도자들’ 꼭지를 쓰면서 이분을 빼놓을 수 없었습니다.

공주고보는 1922년에 설립되었으니 앞으로 5년 후인 2022년이면 100주년을 맞게 됩니다. 이철하는 1924년에 입학해 1927년에 4학년(당시는 6년제)이었는데, 그해 6월 26일 퇴학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는 일본인 교장이 공개석상에서 조선사람을 무시하는 발언을 일삼는데 대해 반성과 사과를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교장은 잘못을 시정하기는커녕 이철하의 아버지를 불러 그 앞에서 심하게 구타하고 곧바로 퇴학시킨 것입니다. 당시 [동아일보]에 ‘반성문 보낸 학생을 구타 출학 / 조선사람을 항상 무시한다는 공주고보 교장의 처사’라는 제목으로 보도된 일입니다.

이철하에 대한 부당한 퇴학 조치는 공주고보 최초의 동맹휴교를 불러왔습니다. 그의 동급생 50여 명이 결집해 ‘조선사람을 차별하는 교장 퇴진’ 등 6개 항의 요구를 내걸고 7월 2일부터 맹휴를 벌인 것입니다. 1년 밑인 3학년생 80여 명, 2학년생 90여 명도 맹휴를 결의하고 동참했습니다. 다음날, 그 다음날에도 계속된 맹휴로 경찰이 1주일간 조사를 벌이고 무려 14명의 학생들이 퇴학 조치되었습니다. 주동자의 한 명인 4학년 한흥손은 경찰에 잡혀가 고문을 받은 끝에 죽음을 당했다고 합니다. 공주고보 개교 이래 최초의 대규모 민족운동이요 2년 뒤인 1929년에 벌어지는 공주고보 맹휴사건의 선구역할을 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철하는 어떻게 교장에게 ‘감히’ 항의서한을 보내게 되었을까요? 몇 개월 전인 1926년 12월 25일에 일황 다이쇼(大正)가 죽었습니다. 공주고보에서도 대단히 엄숙한 추도식이 열렸는데, 학교측은 학생들에게 검은색 추모 완장을 착용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이철하를 비롯한 조선인 학생들은 조선식 상복을 입고 참석해, 사실상 반일 집단시위를 벌였습니다. 주동학생들은 끌려가 무자비하게 구타당했고 이후부터 학교측과 일본인 교사들은 조선인 학생들을 더욱 차별하고 멸시하자 민족의식이 강했던 이철하가 교장에게 당당하게 시정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철하는 1909년 공주 주외면 신기리(효포)에서 태어났습니다. 전주이씨 참판공파의 동족마을인 효포에서 살림이 꽤 풍족한 집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1894년 초겨울에 있었던 동학농민군과 조-일 연합군의 효포 전투 때 왕촌에 피난했다 돌아왔을 정도로 역사의 풍파를 겪어야 했습니다. 당시에 경천에서 효포까지의 계룡사람들, 그리고 우금티에서 이인역(오늘날 면사무소 인근)까지의 이인사람들이 겪어야만 했던 일이지요.

이철하는 공주고보에서 퇴학을 당한 후 경성의 중동고보에 편입해 공부하며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간부(조사연구부장)로 활동했습니다. 학생 대상 강좌와 순회 강연회, 독서회를 개최한 합법단체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1928년 11월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 시내 중등학생들의 비밀결사 ‘ㄱ당’ 사건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치안유지법 위반 죄목으로 동료 13명 중 가장 높은 징역 4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갇혔습니다.

1933년 5월 만기 출옥한 그는 충북 청주에서 『조선중앙일보』(당시 사장 여운형) 지국을 경영하기도 했으나 혹독했던 수형생활의 후유증으로 1936년 9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옥중에서 폐결핵을 얻어 출옥 직후부터 치료했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한 겁니다. 27세의 아까운 나이였습니다. 민주화 이후인 1993년이 돼서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오늘날 그의 후손들은 ‘애국지사 이철하 장학회’를 만들어 그의 뜻을 오늘에 이어가기 위한 구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애국혼을 불태운 공주고등학교 설립 100주년을 앞두고 함께 뜻을 모아야 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479번)에는 이철하의 뜨겁고 옹골찬 삶을 응축한 싯귀가 새겨져 있어 찾는 이의 심금을 울립니다.

누구를 위한 배움이었던가 / 청년의 슬기여.

조국의 독립과 겨레의 자유를 외치던

저 용맹했던 가슴 / 청년의 순전한 넋이여.

그대의 뜻 우리들 가슴에 메아리 되어

산 넘어 바다 건너 울려 퍼지네.

/전 청와대 부대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