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천군 사우(德泉君 祠宇)
덕천군 사우(德泉君 祠宇)
  • 제미영 기자
  • 승인 2009.09.11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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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천군 사우 사당

조선시대 충청남도 공주는 유교적 신념에 따라 목숨을 바치는 당당한 선비의 정신, 국난을 당했을 때도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서슴없이 목숨을 버리는 멸사봉공의 충절 정신, 그리고 어버이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는 효의 정신 등을 몸소 실행한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이를 확인해 주는 공주 지역의 유적이 여러 곳에 많이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 서원이나 사당을 들 수 있다.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훌륭한 정신을 되짚어볼 수 있도록 서원이나 사우에 얽힌 이야기를 시리즈로 엮어봤다.

(1)덕천군 사우(德泉君 祠宇)
덕천군 사우(德泉君 祠宇)는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 1397-1465)을 모신 사당으로 조선시대 1739년에 건립됐으며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1호로 지정됐다.

▲ 덕천군 사우 묘
본관이 전주(全州)인 덕천군(德泉君)은 조선 제2대 왕인 정종의 열 번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정종의 후궁인 충주 성빈 지 씨(誠嬪池氏)다.

성빈 지 씨가 흰 기린 꿈을 꾼 뒤 공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덕천의 천성이 효심이 깊고 우애로워 정종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후(厚)’자로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1456년(세조 2) 원종공신이 되었고 1460년(세조 6) 덕천군에 봉군되었으며 1873년(고종 10) 광록대부영종정경(光錄大夫領宗正卿)으로 증직되었다. 시호는 적덕(積德)이다.

덕천군은 1465년(세조 11년) 향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덕천군은 평소에 검소하여 사치를 멀리 하였고 가난한 자를 살피는 등 성품이 곧은 인물이었다.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농사에 힘써 공주에 논밭을 소유하고 때때로 내려와 직접 농사를 지었다. 어느 해 여름 홍수로 금강이 범람하여 수백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자 자신의 재산을 털어 도운 일로 사람들은 그를 적덕공(積德公)이라 불렀다.

▲ 덕천군 사우 신도비
덕천군 사우는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있던 사당을 1793년(영조 15)에 현재 위치로 옮겨 고쳐지었으며, 현재 소유자는 전주 이 씨 덕천군파 종회이다.

고종 때에는 이건창이 암행어사로 내려와 덕천군 사우 보수와 운영에 도움을 주었고, 일제강점기에 서울과 공주에 거주하는 종인들이 합심하여 재실(齋室)을 건축하였으며, 1960년에 대대적으로 사우를 중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천군 사우는 산의 중턱에 3단의 층대를 쌓고 서남향으로 대지를 조성, 여기에 삼문과 담장을 시설하고, 사우를 배치하였다.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뒤 칸에는 제단을 설치하였고, 앞 칸에는 참배 공간을 둔 전형적인 사당 건물이다.

덕천군 제향은 매년 한식일과 10월초하루(음력)를 기해 올리고 있다.
덕천군 사우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묘소와 신도비가 있다. 덕천군 묘는 본래 남한산성의 서문 밖인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거여리에 있었는데, 이 지역이 군용지로 편입되면서 1974년 덕천군 사우가 있는 충남 공주군 의당면 태산리로 이장하고 석물(石物)도 그대로 옮겨 세웠다.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 성문 밖에 있던 덕천군의 신도비와 묘비 등도 현재 사당이 있는 묘역으로 이때 옮겼다. 덕천군 신도비는 1808년(순조 8)에 건립된 것으로 10세손인 이광사가 짓고 썼다. 신도비는 높이 250㎝, 폭 77㎝, 두께 45㎝이다.

공주대 김진교 교수가 집필한 민족극예술연구소 ‘판’에 의하면 “이곳 충남 공주시 의당면 태산리를 이씨 조선 2대 정종의 열 번째 왕자인 덕천군(德泉君)의 사우(祠宇)가 있는 태산리 왼편 마을이라 하여 ‘사우말’이라 부르기도 했다”며 또한 “덕천군 사우가 옮겨지기 전에는 공산 이 씨가 많이 살았고, 마을도 샛터 또는 신대(新垈)라 불렀으며 200여 년 전에 방축골에서 덕천군 사우가 옮겨오면서 전주 이 씨들이 많이 정착하게 되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