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죽음에 대해서
어떤 죽음에 대해서
  • 육복수 시인
  • 승인 2009.09.07 11:3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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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 노은동에서 논과 밭을 가지고 평생을 농사를 지어시다가 그곳이 개발되면서 보상받은 것으로 건물을 사서 한 켠을 당신들이 살고, 나머지는 세를 놓아서 살던 부부 중, 할아버지가 오월에 돌아가셨다. 내가 그 건물 이층과 삼층을 세를 얻어서 미술, 음악학원을 하던 그 때를 돌이켜보면 그 분들과의 인연이 남남이지만 하염없는 눈물이 난다. 이 살인적이고 강도적인 시절에도 그런 사람이 살다가 즈음해서 갔다는 것은 일종의 신화고 전설일 수 밖에......

내가 소문에 듣기에도 만만찮은 재산가인데도 자식들은 평범한 회사의 월급쟁이로 살게 할 뿐더러 서울 변두리에 전세를 살게하고는, 당신은 또 어떤가, 우리 학원 초등학교 아이들이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어지럽힌 휴지나 껌을 뾰족하게 생긴 연장을 가지고는 계단을 오르내리며 일일이 뜯어내다가 혹, 윗 층에서 내려오는 나를 만나면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먼저 말을 걸며 변명을 하시는 것이다.

‘아 심심해서 말이여’. 동네란 동네 나이 드신 청소부 아저씨와 파지를 줍는 사람들이 당신이 살고 있는 건물 슈퍼 앞을 지나가면 불러다가는 소주든지 막걸리든지를 꼭 대접을 하는데, 이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 나날이라, 더 희안한 것은 그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그럴 때마다 꼭 사전에 무슨 연락이라도 받았다는 듯이 빈데떡이나 호박부침게라든지를 해가지고 할아버지와 그 사람들의 술시중을 하는 것이다.

몸 어딘가에 조금이라도 기름기가 끼고 남들보다 자신이 물질적인 것의 우위에 있다는 판단이서면 거들먹거리며 행동이 달라지고 정신이 가락오락하는 이 시대의 시류로 볼 때, 그는 오히려 이인에 가까웠다. 혹자는 악어의 눈물에 감동한 물고기의 순진함이라고 나의 태도를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땅은 자본주의 사회이고 부는 흐르는 곳으로 흘러 간다. 부당하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축적되지 않은 부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보면, 축적된 부를 움직이는 사람과 그 쓰임새에 사회적 정당성의 촛점을 맞출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가난이 죄가 아니고 불편함일 뿐이듯이 부 또한 죄가 아니고 편리함일 뿐이라고 보면 너무 느슨한 사회적 인식의 발로인가. 물론 부정하게 축적된 부에 대해서 눈을 감는 사회는 썩은 사회이겠다. 그러나 작금 이 땅의 가진 자와 못가진 자, 소위 말하는 좌 우, 진보 보수의 이념적 대결로 인한 보이지 않는 커다란 손실은 무엇으로 누가 보상하는가. 설사 그로인한 승자의 환호 뒤에는 또 다시 패자의 칼을 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소모적인 쟁투가 고래로 흘러온 인간 역사의 장이라고 한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투쟁자와 방어자의 논리로는 목적과 과정 모두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무언가를 이끌어간다는 것으로 삶을 영위할 것이고, 나와 같은 초부는 산중에 묻혀 고사리나 산나물을 뜯어며 허공을 보고도 낄낄거리고 무덤 옆에서도 허허거리며 삶을 영위하는 그런 것도 있다.

내가 그 노인의 죽음을 애도할 수밖에 없는 것은 적어도 그는 사람살이의 정의에 달통해 있었다는 것, 가지고 못가지고를 넘어 선 그 어떤 곳에서 살다가 갔다는 것, 그러므로 그는 사람으로 살다가 사람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 소주예찬 3 -

소주가 왜
물 같은지 알겠다.
먹고 물이 되라고
먹고 흘러 버리라고
인사불성 좌충우돌
나와의 인연을 끊고
룰루랄라 룰루랄라
흩어져 버리라고
무언무색으로
오늘도 기다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