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의 역사인물 '기허당 영규'
공주의 역사인물 '기허당 영규'
  • 김정섭
  • 승인 2017.09.07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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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김정섭
© 백제뉴스

임진왜란 최초의 승병장

유교를 국정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 들어와 승려는 팔천의 하나에 속했다. 기생이나 백정, 무당과 같이 천대를 받은 것이다.

어쩌다 불교를 신봉하는 왕이나 왕비가 있게 되면 모진 질타를 받았다. 임진왜란 때까지도 그랬다. 영규대사가 승병을 일으킬 때 “밥 한 그릇도 다 나라의 은혜다.”라고 말했다는 [선조실록]의 기록이 이채롭다. 천하게 취급받던 승려신분으로서 그는 누구의 명령도 없이 최초로 승병을 일으켰다.

공주목 계룡에서 태어난 영규의 본명을 알 수 없으나 본관은 밀양 박씨이다. 갑사에서 출가해 영규라는 법명을 받았고 호는 기허당(騎虛堂)이다. 공주 계룡산의 4대 명찰, 즉 동쪽의 동학사, 서쪽의 갑사, 남쪽의 신원사, 북쪽의 구룡사(반포면 상신리)가 각기 다른 특색과 기운을 갖고 있는데, 그중 갑사가 가장 번창했다.

백제시대에 처음 세워져 통일신라 때에는 화엄십찰의 하나로 손꼽혔으니 그때부터 전국적인 명찰이었다. 백제의 수도였던 웅천주 치소와 가까워서 더욱 번성했을 것이다.

영규는 소년시절 호랑이를 때려잡았다는 설화가 전할 정도로 용력이 남달랐는데, 키가 보통사람의 갑절이나 되었다고 한다. 갑사의 부속암자인 청련암에 있으면서 자주 무예를 연마했다. 1592년 4월, 일본군이 침략해 국토를 유린하고 백성들을 학살하자 3일 동안 통곡하고 승려들을 규합했다.

이때가 6월이었는데, 4월 14일에 임란이 일어난 후 최초의 승병이었다. [선조실록]에, “승려 영규가 ‘우리가 일어난 것은 조정의 명령이 있어서가 아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자는 나의 군대에 들어오지 말라’ 하니, 승려들이 다투어 모여 숫자가 8백에 이르렀다‘”는 보고 내용이 전한다.

영규의 승병은 조헌 의병과 함께 작전을 펼쳤다. 조헌은 홍주 교수, 전라 도사, 보은 현감에 이어 공주목 제독관(1586년)을 지냈다.

그가 공주향교에서 북을 울리고 기를 세워 의병을 모집했더니 공주를 비롯한 충청도 10여 개 고을에서 의병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나라를 지켜내자는 양심적 양반층, 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과 양민들이 주축이었다.

청주성을 되찾다

이들은 청주성으로 진격했다. 일본군의 후방 거점이자 추풍령을 넘어 경기도 용인으로 이어지는 오른쪽 보급선이었다. 의병 연합군은 영규를 선봉장으로 청주성을 공격했다.

일본군이 의병을 얕잡아 보고 성문을 열고 나와 싸우다가 영규대사가 지휘하는 승병의 용맹한 기세에 밀려 퇴각했다. 적은 조총병을 앞세웠지만 의병은 지형과 수풀을 이용해 잠복하고 있다가 활을 쏠 수 있는 거리에서 포위하고 일시에 공격하는 유격전으로 승리한 것이다.

의병 연합군은 사다리와 밧줄을 이용해 성벽을 오르고, 주력은 서문을 치면서 동남북 삼면으로도 공격태세를 취해 적의 주력을 분산시켰다. 그런데 갑자기 벼락이 치면서 큰 소나기가 내려 공격을 중지하게 되었다.

그날 밤 일본군은 일부러 많은 깃발과 허수아비를 세우고 조선측 관군이 맡고 있던 북문을 뚫어내고 도망쳤다. 이로써 다음날 아침 의병 연합군은 청주성으로 입성했다.

청주성 싸움은 임진왜란에서 첫 승전이었다. 영규대사의 활약은 전국 곳곳에서 승병이 일어나게 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조정에서 조헌에게 종4품 종상시 첨정, 영규에게는 당상관의 벼슬과 단의(丹衣)를 내려 표창했다.

호남과 호서를 지켜낸 금산전투

청주성을 탈환한 직후 영규와 조헌의 연합군은 호남과 호서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데 뜻을 같이하고 금산성으로 진격하기로 했다. 일본군은 제일의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차지하려고 남해안을 통해 상륙하려 했으나 막강 이순신 수군에게 막혔다.

그래서 육로를 택한 것이 금산이었다. 이곳에 호남 공략 전초기지를 두고 다른 곳보다 두세 배가 많은 1만 명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영규는 금산성을 칠 때, 광주목사 권율의 관군과 연합해 공격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며 급한 전투를 반대했다. 그러나 조헌은 “군주가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목숨을 버려야 하니, 성패와 이해관계를 어떻게 돌아볼 수 있겠는가?” 하며 곧장 진격을 주장했다.

이보다 한달여 앞서 고경명의 의병이 7천의 작지않은 군세로 금산성을 공략했지만 중과부적으로 일본군에 크게 패한 적이 있었다. 한데 조선군은 일본군의 10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들은 금산성 10리 밖 연곤평에 주둔하고 권율의 관군을 기다렸다. 그 틈에 일본군이 성에서 나와 의병대의 배후를 끊고 선제공격을 해왔다. 조선군은 날이 저물 때까지 결사의 각오로 싸워, 세 번 쳐들어온 적을 세 번 물리쳤지만 끝내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칠백의총의 유래가 된 장엄한 싸움이었다. 영규 대사도 마지막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갑사로 이송되는 도중 숨을 거두었다. 그가 숨진 곳은 계룡 월암리, 계룡면사무소 부근이라고 전한다. 사람들은 예의를 갖춰 장사를 지내고 계룡 유평리에 매장했다.

한 사람의 승려로서보다도 전쟁을 이끈 지도자로 대우한 것이다. 결국 일본군은 한 달 뒤인 9월 17일, 금산성을 포기하고 성주 방면으로 퇴각했다. 의병들이 목숨을 바쳐 호남과 호서를 온전히 지킬 수 있었으니 금산 전투는 패배한 것만은 아니었다.

선조는 영규에게 종2품 동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내렸다. 하지만 승려 신분이라 충신 명정을 받지 못하다가 사후 130여 년이 지난 1720년(숙종 46)에야 비로소 명정을 받게 되었다.

1738년, 갑사에 표충원을 건립하고 왜란의 승병장 서산, 사명, 영규 대사의 영정을 함께 모셨다. 충신 명정을 받아 1813년에 건립한 정려가 계룡면사무소 앞에 수호신처럼 서 있다.

영규대사의 추모제는 유교와 불교계에서 각기 갑사에서는 ‘기허당 영규대사·호국의승병 추모재’를 가을단풍이 절정인 10월 하순경에 봉행하고, 묘소 앞 영규대사 영정각에서 지내는 추모 제향은 올해의 경우 9월 25일에 치러진다.

더불어 그의 뜻과 행적을 역사 속에서 기리고 현재에 알리려는 노력이 함께 이뤄질 필요가 있다. 행적 몇 줄로 그를 박제화하지 말고, 살아움직이는 역사인물이 되게 하자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