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꽃밭에 숨다
코스모스 꽃밭에 숨다
  • 조영숙
  • 승인 2016.10.19 15:17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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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조영숙
© 백제뉴스

가을이 되면, 어릴 적 살았던 내 고향 길가에는 코스모스꽃들이 담처럼 길게 피어있었다.

유난히 키가 컸던 코스모스 꽃밭은 친구들과 숨바꼭질도 하고 꽃을 찾아 날아 온 작은 벌꿀을 잡아(아마도 신발을 벗어서 잡아 돌렸던) 기절시키며 놀았던 놀이터이기도 하였다.

아마도 이 맘 때쯤일 것이다. 내 위로 언니가 하나 있다.

유난히 몸이 약해 집안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언니였다. 자라면서 크게 한번 다투었던 기억이 있다.

작은 말다툼으로 시작하였는데 참지 못한 언니는 냉장고에 들어있던 달걀들을 꺼내서 갑자기 던지는 것이었다. 달걀이 깨지면서 노란색, 흰색의 끈끈한 물들이 머리부터 몸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잔뜩 성이 나 있는 내 표정을 보고 언니는 달아나기 시작했지만 동네 한가운데서 이미 붙잡힌 신세가 되었다. 언니를 눕혀놓은 후 눈을 질끈 감고 양손으로 사정없이 두들겨 주었다.

그때 동네사람들이 우리집에 구조요청을 했고 아버지께서 헐레벌떡 뛰어오시면서 소리치시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잡히면 죽음이다’ 라는 심정으로 두리번거리다 코스모스꽃밭으로 숨어버렸다.

아버지는 이미 혼자 몸이 아니었다. 오른손에 커다란 우산을 들고 계셨고 뾰족한 우산콧날로 길고 긴 코스모스 꽃밭을 여기 저기 쑤시기 시작하셨다.

“감히 언니를 두들 겨 패다니!, 빨리 안 나와?” 한참을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치시는 아버지를 보시고 동네 어르신들이 간신히 뜯어 말려 집으로 보내실 동안 코스모스 꽃 속에 숨어있던 내 심장은 벌떡거리다 못해 몸을 뚫고 나올 정도로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해가 지고 캄캄해지기 시작하였다.

집에 갈 수도, 꽃 속에 숨어있을 수도 없는 상황에 배도 고프고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쭈글쭈글한 손이 내가 숨어 있는 곳을 더듬거렸다. 잡고 보니 아래 집에 사시는 아주머니의 손이었다. 아주머니 손을 잡고 들어간 방에는 곰방대를 물고 연기를 뿜어대시는 아저씨가 말없이 앉아계셨고 곧이어 따뜻한 저녁상이 들어왔다.

그 시간까지 나를 찾으러 오지 않는 어머니가 원망스러웠지만 그런 것을 따질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주머니가 펴주는 이부자리속에 들어가 아저씨의 잦은 기침 소리를 들으며 서러운 마음에 눈물을 흘리며 잠이 들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 어머니가 ‘둘째딸 찾아다가 재워 달라’는 부탁을 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그 서운함을 덜 수 있었다.

이제 옛 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아버지에 쫓겨서 무서워 덜덜 떨었던 큰 코스모스도, 함께 놀던 친구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나를 재워 주셨던 아주머니댁도 없어지고 그 집 마당에 자두나무 두 그루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새삼, 오늘따라 코스모스속으로 숨어버린 가을 밤! 그 시절이 무척 그립다.

/천안일봉유치원 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