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일기
봄, 일기
  • 육복수 시인
  • 승인 2008.04.25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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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봄에는 미리미리 일을 해놓아서 비교적 한가한 날을 보내고 있다.

받아놓은 소똥을 흩뿌리고 트렉터를 불러 밭을 갈아엎고, 골을 타면서 잔돌들을 모두 골라내고 작년에는 좁고 얕게 만들었던 두덕을, 올해는 높고 넓게하고 비닐을 씌워서 고추고랑을 만들어 놓고나니 이렇게 한갓질 수가 없다.

일일이 손으로 하던 작년에 비하면 편하기야 말할 수 없이 편했지만, 배부른 소린지는 몰라도 개운하고 뿌듯한 느낌은 적다. 아이고 허리야 팔이야 하면서 이눔의 일 언제 끝나냐고 땀을 훔치며 한숨 쉬면서 먹던 막걸리의 맛을 느끼지 못했고, 산짐승처럼 밭에 붙어서 비닐의 가장자리를 묻어가며, 아내와 되작거리던 대화도 기계의 소음이 빼앗아 가버렸다.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다고, 아주 싫지는 않은 것이, 일단은 몸이 편하다는 것과, 조금은 여유롭게 산골의 봄 정취를 즐길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기계로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조차 들기도 한다. 일에 치어서 바득바득 농사준비를 할 때도 나름대로 성취의 기쁨 쯤은 있었지만, 그런 일들을 은연 중에 회피하고 편안함을 바라는 마음이 솔솔 피어나는 것을 보면, 나는 부지런한 사람 측에는 끼이지 못 할 것 같다. 

그러나 동네 어른들의 일하는 모습을 보면 저렇게 일을 하고도 그 다음 날, 일어나기를 평생을 반복한 농부의 끈질긴 저력에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처마 밑 꽃밭에는 꽃들이 만발했다. 현관에 흙 찍어들인다는 아내의 농간에 넘어가서 마당에 심어놓은 잔디에도 푸르스름하게 물이 올라온다. 개복숭아 분홍꽃이 몽환적이다. 희끔한 산벚을 위시해서 숲이 눈부시다.

저물녘 아내와 산책겸 산으로 올라갔다가 봄바람 산바람에 취하고 취해서 헤매다가 내려와서, 산에서 가져온 첫물 고사리와 두릅을 데쳐서 막걸리 몇 잔을 주고 받으며 밤이 깊어간다. 봄밤이 깊어간다. 살아있는 것이 좋을 때가 있구나.   

- 난간에서 -

저 아래

접점이 보인다

헤아림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떨어지다 남은

잎들 사이로

세 발 자전거를 탄

아이의

재잘거림이 들려온다

지나야 할 것은

허공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