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문화 지체현상
교육 문화 지체현상
  • 윤여관 우금티사업회 이사
  • 승인 2008.04.01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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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력과 폭력에 의존하는 질서는 억압으로 체감 된다. ‘비정상’이라는 개념은 우리 머릿속에 소위 ‘정상’이라는 고정관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학생의 특성이 변했다고 느꼈을 때 그 원인을 찾는 태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가정교육 등에 원인을 돌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문화지체에서 원인을 보려는 태도이다. 가정교육 등에 원인을 돌리는 것은 기존의 관념은 고수하고 결손가정이나 문제아 등의 단어를 생산하게 한다. 그러나 정상적인 가정이라는 말이 이른바 결손가정의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고 있는가? 초등학교 교과서와 숙제, 드라마 등에서 나는 많이 보았다. 부모님 발 씻어드리기, 아빠 얼굴 그려오기, 족보 만들기 등등. 결손가정의 아이들은 교육의 이름으로 난도질을 당하는 것이다. 행복한 가정을 강조하는 것은 그 의도와 상관없이 그 반대편의 현실을 죽이는 것이다. 고착된 미와 추를 적극적으로 구획하는 곳에는 불평등이 발생한다. 우리 사회는 분명히 이 덫에 걸렸다. 과거의 관념으로 미래를 담으려는 것을 우리는 보수라고 부른다. 교육은 무릇 미래를 창조하는 것 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학생의 변화 속에서 미래사회의 변화 가능성을 읽으려 해야 할 것이고 거기에 맞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기존의 길 만을 고집할 게 아니라 이미 너무 많은 아이들이 다니고 있는 마음속의 길을 잘 살필 수 있는 사랑과 관용의 태도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문화지체에서 원인을 찾고 지체현상을 일으키는 원인을 분석하고 해소하는 노력은 절실하다.
 
그러나 이 새로운 디자인은 현실사회에서는 두려운 것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체벌(심리적 체벌도 포함해서)에 의존한다.  위압적 태도에 의존 해야만 존립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존재가치가 없는 것이고 교육이 아니다.
 
난 어렸을 때 정육점에 심부름 가기가 무서웠고 싫었다. 거기에 가면 동물들의 생생한 시체를 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내 딸과 함께 대형 가게에 가면 내 딸은 정육코너에서 입맛을 다신다. 자연의 흔적을 없애면 없앨수록 부가가치는 높아지고 상품성이 생기는가 보다. 백화점에 가면 미만 있다. 거기에 추는 없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자본은 미와 추를 구분해야 살 수 있다. 노동과 생산의 흔적을 없앤 채 뽀얗게 분을 바른 상품만이 살아남는 것이 경쟁력 이란다. 구매력은 미가 되고 노동은 추가 된다. 백화점에 진열된 것은 사람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나 보다. 160센치 이상 50키로 미만의 용모 단정한 여성? 학교는 예외일까? 자본시장에서 잘 팔릴 수 있는 인간을 찍어 내기위한 공장으로 비유하면 지나칠까? 슬프게도 우리 사회에서 이 자본의 법칙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은 없어 보인다.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이렇게 자본으로 획일화된 사회에서 가장 큰 침투력을 갖고 있다고 보는데.
 
학교에는 양아치라는 애들이 있다. 백화점으로 치면 불량품? 자본시장에서, 기성의 가치관시장에서 잘 안 팔릴 것을 알면서도 끝없이 딴지를 걸어 대는 그들에게서 난 묘한 희망을 본다. 미에는 순정미, 우아미, 교미, 고귀미, 존엄미, 위엄미, 숭고미, 비장미, 골계미, 추미 등등 참 많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왠지 미도 획일화 되어 있다.  순정미나 허위의 우아미존엄미만 판을 치고 삶의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 '겨울연가'는 진실과 거리가 멀다. ‘쉬리’나 ‘친구’도 삶을 진지하게 접근하기 어렵게 한다. 재미는 있나? 반면 김기덕의 ‘수취인불명’을 보면 기분이 더럽다. ‘양철북’을 봐도 찝찝하다. 거기에는 우리가 살면서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부분들이 나온다. 분명히 우리 삶을 규정짓는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상에서 그것들을 외면하려 한다. 왜냐면 그곳에서 우리가 느껴야 하는 것은 ‘겨울연가’류가 주는 완쾌나 통쾌가 아니라 불쾌감을 수반하며 성찰과 각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통속적인 미적 기준은 '단정' 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의 패션은 내용적으로 변한게 없다. 졸업식 때, 입사 면접 볼 때, 선 볼 때 등등 입고 나가는 옷들을 보면 거의 비슷하다. 원빈이나 정우성, 고소영류의 자본 스타가 개체분열 했다. 과거 신성일 이나 남궁원의 스타일이 먹혀들어 갔듯이....... 단정이라는 잣대로 패션을 재단질 하기 시작하면 삐에르가르뎅이나 파올로구찌나 크리스챤디오르 등의 명품류?부터 시장패션까지의 위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 왜냐면 적자와 서자 그리고 족보 외 그룹이라는 혈통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점령군의 군복을 찢어 입고 군모포로 외투를 만들고, 삼팔선 철조망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패션은 어떻게 비쳐질까? 우리는 그런 패션에 거부감을 갖도록 자본과 권력, 그리고 그 시녀뻘 되는 윤리와 도덕으로 부터 쇠뇌 당한 것은 아닐까? 교사는 학생의 모범이 되기 위해서라도 양복에 넥타이를 단정히 입고 다녀야 한다고? 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