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은 왜 하며 농성은 왜 하는가?
단식은 왜 하며 농성은 왜 하는가?
  • 李達雨(공주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 승인 2008.01.31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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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斷食)

처절한 각오만 보지 말고
간절한 마음을 읽어 주오

농성(籠城)

북서풍 살을 에도
함께 하면 봄이 오리니

지금 공주대학교에서는 명분도 없고 현실도 모르고 비전도 갖지 못한 사리(事理)를 모르는 몇 사람들 때문에 불행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게다가 그 끝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가늠하기 어려우니 더욱 큰일이다.

김재현 총장과 그 측근들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인 교명변경을 온갖 술수(術數)를 동원하여 획책해 왔다. 김 총장과 그 측근들이 마치 무엇에 쫓기듯 허겁지겁 만들어 교육부에 제출한 소위 [공주대학교 교명변경 신청서]에 대해 교육부가 담당과장 선에서 반려 결정을 내린 것이 그나마 불행중 다행이었다.

그런데, 교육부로부터 반려 통보를 받은 지난 해 12월 27일 이후로 지금까지 교명변경 강행론자들이 보인 행보를 보면, 저들이 아직도 교육부로부터 불가 판정을 받은 교명변경 책동이라는 무리(無理)한 일에 대한 미련을 끝내 버리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교육부는 교육에 관한 한 공적인 권위의 상징이다. 그러한 교육부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끝내 교명변경에 집착하고 있다면, 그 이면에는 무엇인가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혹 공심(公心)이 아닌 사욕(私慾)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쌍(不常)한 일이다. 딱한 사람들이다.

이미 학교는 지극히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지만, 앞으로 이들의 준동을 분쇄하지 못하면 공멸(共滅)이라는 최악의 참담한 사태가 필지(必至)하고 말 것이다. 그야말로 게도 구럭도 다 놓치게 될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어떤 어려움을 감내하고라도 파국은 막아야 한다.

저들이 교명변경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학교가 더 이상 죽음의 늪에 빠져 들어가서는 안 되겠다는 위구심(危懼心)이 생기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학교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뜻있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다. 그것이 지난 해 11월 5일부터 7일까지 사흘 동안 진행되었던 천막집회이다. 그 뒤로 학생들의 집회도 몇 차례 있었다. 교명을 지키기 위한 교수, 학생, 시민들의 모임 또한 결성되었다.

그런 모임들이 주체가 되어 여러 가지 방도로 김재현 총장과 그 측근들에게 교명변경을 강행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타이르기도 하고 경고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우이독경(牛耳讀經)이었다. [소귀에 경 읽기]였다.

지난 해 11월 5일의 옥외집회 이후로 어느덧 해가 바뀌었으며, 벌써 석 달이 다 되어 간다. 교명변경 강행론자들에 대한 설득과 인내의 한계를 절감하고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간 것이 지난 해 11월 28일이니 오늘로 벌써 두 달이 훌쩍 넘었다.

교육부의 반려 결정 이후 소강상태처럼 보이는 지금 이 순간이 매우 위험한 시점이다. 당장 폭풍한설이 몰아치고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먹장구름이 걷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교의 오늘과 내일을 염려하는 일념으로 지금까지 함께 했던 사람들은 교수든 학생이든 동문이든 시민이든 다시금 초심(初心)으로 돌아가 비상한 각오로 닥쳐올 풍파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래저래 추운 농성장의 한 귀퉁이에 앉아 있자니 답답하고 안타깝고 처량하고 분한 생각이 그치질 않는다. 만감이 교차한다. 내가 왜 지금 여기서 단식을 하고 농성을 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 소회(所懷)의 아주 작은 한 자락을 두줄시로 표현해 보았다.

이 글의 모든 행간(行間)을 일관하여 내 마음은 오로지 한 가지 생각에 모아진다. 정의(正義)는 공심을 먹고 자라는 것이지 결코 사욕에 물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대학은 정의와 진리의 자유공간이다. 대학에 정의와 진리가 자유롭게 노닐고 자라나도록 하려면, 대학 구성원 모두에게 공적인 세계에 헌신하려는 마음의 꽃, 심화(心華)가 만발해야 한다. 차별 없이 그 빛과 향기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대학이다. 그래야 대학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