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그 슬픔
생, 그 슬픔
  • 육복수
  • 승인 2008.01.18 11:11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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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며칠의 눈과 한파와 더불어 해가 바뀌었다. 새벽, 점점 굵어지는 눈발에 베어놓은 나무만 얼른 지게에 올리고는 산을 내려와서는 머루 다래의 밥을 챙겨주고 아침 불을 넣는다.

마른 장작을 아궁이에 차곡차곡 넣고는 장작 중간쯤에 얻어온 양초를 걸쳐놓고, 아들 녀석의 다 쓴 공책 한 장을 찢어서 불을 댕겨 붙이면 지지직거리며 양초가 흘러내리며 불이 붙고 이내 장작 밑에서부터 활활 타오른다.

그 앞에 앉아서 불을 뒤적거리며 담배 한 대를 피우며 언 몸을 녹인다. 따습다.

땅이 어디고 하늘이 어딘지 모를 정도로 밖은 눈이 내리고, 타는 장작이 무어라 무어라 자꾸만 내게 말을 건다. 세상과 인연한 것으로부터의 모든 끈을 끊으라는 소리처럼 타 타닥 타아, 팽창한 줄 끊어내는 소리가 재 되어가는 장작으로부터 크게 크게 벌겋게 들려온다.

살아있는 것, 또는 살아가는 것의 궁극은 무엇인가를 내가 말할 자격이 없다. 왜, 내가 모르므로. 그러나 살아가며 살아내고 있는 이 삶이 늘 불만과 불안의 연속인 것만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건강, 자식, 노후, 나의 완성 등.

살아있는 한은 운명처럼 안고 가야하는 이 빌어먹을 것으로부터 놓여나고 싶은데, 그것이 쉽지를 않네. 한 생이 생답게 생을 누린다는 것이 뭔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저 빌어먹을 것들로부터 놓여져 자유롭게 내가 추구하는 무언가를 완성이든 미완성이든 하면서 살다가 가는 것, 그것 아니겠는가.

이 따위의 생은 정말 싫다. 오히려 저 빌어먹을 것들의 호위아래 사는 건 뭐 그런 것 아니냐는 듯, 받아들이는 나의 자세는 구토 구토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지랄을 하든지 발광을 하든지 내 속에서의 살아내는 토양을 바꾸어야지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같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장작이 벌겋게 타서 재가 되듯이, 어제는 장작이었고 오늘은 벌겋게 타고 내일은 재가 되어 바람에 풀풀풀 날리듯이, 그리고 사라지듯이. 삶의 끈에 묶이고 묶여 개 끌려가듯 끌려가는 생이여, 이것이 아니면 저것으로 저것이 아니면 다시 이것으로 돌아오는 한이 있어도 지금 이것은 아닌 것 같다는 것.

머루 다래가 짖는다. 밖을 내다보니 눈보라가 어마어마하다. 불이 사그라든다.

장작을 가지러 밖으로 나가보니 내 집으로 오는 길이 거의 막혔다. 막힌 길을 뚫고 걸어서 어적어적 오는 자는 반겨야 할 자다. 차는 못 온다. 마음이 좋아진다. 나도 못 가고 그도 못 온다. 막힘 막힘 그 위의 뽀오얀 눈.

지붕 위, 허공으로 가벼이 가벼이 흩어지는 연기가 오, 아름아름답다.

차암, 나

머루는 동네에서 얻어 왔고
다래는 시장에서 사왔다
청산에 오래 살고 싶어서
개에게도 그렇게 이름을 붙였는데
차암 나, 내가 이렇다니까
정작 물어봐야 할 청산에게는
입도 벙긋 안했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