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끝은 끝내 자립하리
네 끝은 끝내 자립하리
  • 백제뉴스
  • 승인 2011.07.28 17: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이 얼마 전에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면서 노숙인에 대해 국가가 의무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는 측면에서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노숙인의 인권보호 및 복지지원은 그런대로 쉽게 접근할 수 있다고 하지만 자립지원 즉 자활은 말처럼 쉽지 않다는데 있다.

우리나라에서 노숙인에 대해 국가가 일정정도 개입하며 지원을 시작한 것이 13년밖에 되지 않는다. 분명 노숙인은 그 이전부터 존재해 왔음에도 국가는 부랑인, 거지, 양아치, 사회적 위해를 가하는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 하면서 사회에서 격리시켜 놓고 무관심하다가 IMF경제체제가 되면서 실직노숙인 문제가 사회적 핫 이슈로 떠오르자 부랴부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노숙인에 대한 국가적 관심은 일시적 보호에 머물러 있었다. 다시 말해 거리에 쏟아져 나온 노숙인을 거리에서 보이지 않게만 하면 되는 것으로 여기고 서둘러 법에도 없는 시설인 노숙인 쉼터를 만들어 노숙인들을 그곳으로 가두어 버렸다.(예전의 격리수용보다 조금 나은 형태였다) 그리고는 천편일률적으로 몇 개월 내에 자활해서 가정으로 복귀하라는 것이었다. 즉 노숙인의 발생하는 원인, 노숙인의 인권보호, 예비 노숙인의 생활지원 및 자활에 필요한 사전 훈련 및 경과과정도 없이 무작정 자활해서 가정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것이 전부였다.

우리 사회에서 노숙인은 무한 경쟁이라는 시장경제체제와 국가의 사회보장제도의 미흡으로 인해 탄생한 사회적 산물이다. 미국이나 유럽처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서 마약중독이나 알코올중독의 결과로 생겨난 노숙인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은 빈곤가정에서 자라나 불안정한 직업군에서 일하다가 경제적 파탄이 원인이 되어 빚에 시달리다가 가정이 해체되어 거리로 나온 것이다.

이런 노숙인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미국이나 유럽보다는 자활이 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숙인을 우리 사회구조가 필연적으로 탄생시킨 결과라면 그 사회구조의 변화 없이 자활이 가능할까? 힘겹게 살아가는 2,000만의 빈곤층은 가장이 실직하여 경제력을 잃는 순간 저렴한 주택의 부족, 사회보장제도의 미흡 등으로 노숙의 위험에 놓이게 된다.

즉 대부분의 빈곤층은 안정된 일자리가 아닌 임시직이나 막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므로 실직이후 재취업이 어렵다는 것이다. 재취업의 기회가 없다는 것은 곧 노숙으로 전락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노숙인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보호된 일자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노숙인과 같은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보호된 일자리라고 하는 것이 사회적 일자리란 명목으로 일시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다시 말해 체계적이고 지속가능한 일자리 제공을 통해 자활대책이 마련되어야 하는데 대부분 제공되는 보호된 일자리라는 것이 제한적이고 임시적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노숙인에게는 아주 박하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사회적 기업인 야베스공동체를 통해 자립의 길을 모색해 왔는데 그것도 쉽지 않은 지경에 이르렀다. 세탁사업부에서 일하고 계신 백 0 0 아저씨, 희귀난치성 질환을 앓고 있기에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다행히 대전시에서 노숙인, 장애인 일자리 사업으로 시작한 세탁공장에서 다림질을 열심히 배워 제법 어느 정도 숙련된 기술자가 되었다.

그러나 보통사람과 비교하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차이가 난다. 체구가 왜소한 김 0 0도 다행히 세탁기계 조작을 배워 이제는 스스로 세탁기계를 조작할 수 있는 단계까지 왔다. 그럼에도 아직은 혼자 기계를 조작할 수 없다. 이렇게 야베스공동체에서 일하는 대부분은 이곳이 아니면 자활을 이야기 할 수 없다. 그러나 당장은 야베스공동체가 제대로 굴러가야 계속 일을 할 수 있는데 9월부터는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바로 이곳이 아니면 자활을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들과 더불어서 말이다.

늘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며, 자활이 가능한 기업을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하며 왔지만 길이 쉽게 보이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아니 이렇게 가다가는 야베스공동체가 문을 닫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심히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끝내 자활을 꿈꾸는 것은 여기가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자활하지 못하면 더 이상 길이 없기 때문이다.

길이 보이지 않아도 자활을 위해 조금씩 양보하며 끝없는 도전을 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야베스공동체가 위기에 놓였다고 하더라도 창립고백처럼 이곳이 야베스공동체 식구들의 마지막 비상구라는 새로운 각오로 끝내 가족의 자활과 야베스의 자립을 향해 오늘도 힘겨운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 것이다. 끝내 우리는 자립하리라!

                                                  벧엘의집 원용철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