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이 된 친구
스님이 된 친구
  • 강수돌 고려대교수.신안리 이장
  • 승인 2007.10.31 16: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스님이 된 친구가 있다. 1980년대 군사 독재 시절에 학생 운동을 하던 친구다. 나는 겁이 많은 피라미 정도였다면 그 친구는 겁이 없고 똑똑한 인물이었다. 나는 ‘민주주의 만세’와 ‘독재 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주동하고 보란 듯이 경찰에 끌려갈 용기도, ‘저 낮은 곳으로 임해’ 노동 대중과 함께 하려 노동 현장으로 들어갈 용기도 없어, 학문을 통해 세상에 진리의 빛을 찾아보겠노라 대학원에 진학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저 낮은 곳으로 임해 노동 대중과 함께 계속 운동을 하다 이른바 ‘조직 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까지 했다. 뭔가 정신없이 살던 나는 옥살이를 하는 그 친구 면회도 못 가본 채 그럭저럭 1980년대 중반 세월이 흘렀다. 그 뒤 그 친구의 소식은 끊겼다. 그 사이 나는 석사 과정을 마치고 결혼 뒤 군 복무를 마치고 독일 노사관계를 학문적으로 탐구하러 1989년에 10개월 된 첫 아이를 안고 유학을 떠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친구는 바로 그 1989년에 출가를 했다. 해인사 백련암에서 기거하시던 성철 큰스님의 문하생으로 입문했다.
 
그리고 2007년 10월 14일, 나는 경남 산청의 겁외사(성철 스님의 생가) 선방에서 그 친구를 다른 지인 몇몇과 함께 또 만났다. 실은 1996년에 그 친구 부친상이 났을 때 나는 평소에 존경하던 친구라 부랴부랴 길을 물어 문상을 간 적 있다. 상중이라 아무런 이야기도 나누지 못하고 “오랜만이다.”라는 화두 같은 인사말만 건넨 터였다. 내가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지 2년 만이었고, 그 친구는 스승인 성철 스님이 타계한 지 3년 만이었다. 당시 내가 머리 깎고 스님이 되어 버린 그 친구에게 꼭 묻고 싶었던 것은 “어떤 비전을 갖고 스님이 되고자 했는가?”하는 것이었다. 그 질문의 깊은 밑바닥에는 “대중과 더불어 숨 쉬고 부대끼면서 사회 변화에 일조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은가?” 하는 일말의 저항감이 깔려 있었다. 실은 이 질문은 늘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 뒤 나는 친구 스님을 만날 기회가 몇 번 있었음에도 사정이 허락지 않아 번번이 아쉬움만 달랬다. 그러다가 2007년 10월 14일 늦은 오후에 약 두 시간 정도 그 친구를 제대로 얼굴을 보며 만났다. 안타깝게도 그 친구는 우연히 걷다가 다리가 삐꺽해 연골이 나가는 바람에 수술까지 하고 목발 없이 걷지 못한다. 앞으로 몇 달은 족히 더 휴식을 취해야 한다.
 
‘무소유’를 실천하는 듯 선방에는 아무 집기가 없었다. 스님은 손수 찻상 위의 온갖 다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어가며 구수한 보이차를 두루 권했다. 차를 마시며 예전에 꼭 묻고 싶었던 마음 속 의문을 정식으로 내뱉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그 말이 목구멍을 넘어오질 않았다. 그냥 편하게 이것저것 얘기했다. 그러다 “성철 스님 가르침 중에서 귀한 말씀 하나라도 가르쳐주시지요.”라고 내가 주문하자,
 
 “허허, 그냥 차나 마시고 가시지요.”라며 웃었다. ‘우문선답’이라고나 할까?
 
 하긴, 몸도 불편한 상태인데다 실로 오랜만에 만나서 무슨 세미나를 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얼굴 보며 옛정이라도 되새기는 것이 나은지 모를 일. 동행인이 물었다.
 
 “스님들도 오랜 시간 참선을 하다 보면 졸음이 올 때가 있을 텐데, 어떻게 이기시나요?”
 
 “하루에 세 시간 자거나 전혀 자지 않을 때도 있는데, 화두에 집중하다 보면 그 집중력이 졸음을 태워 없앨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심지어 잠잘 때조차 화두를 참구하기도 하거든요. 하하. 그런데 제 스스로 실제 그렇더라 라고 말할 정도가 되면 좋은데, 다른 사람이 그렇다고 하더라 라고 말하려니 이것 참…. 하하.” 그 말에 또 다른 이가 묻는다.
 
“스님들 식사는 어떻게 하시고 간식 같은 것도 있나요?”
 
“새벽 3시에 예불 올리고 5시에 아침 공양을 하면 오후 5시나 6시에 저녁 공양을 합니다. 주로 차를 많이 마시고 가끔 다식도 함께 합니다. 식사로 면 종류도 좋아들 하시는데 면 종류가 나온다 하면 좋아서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지요. 찹쌀떡 같은 것도 잘 먹는 편이지요. …” 5시가 되자 간단한 목탁 소리가 들렸고 공양 시간이라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에 6시가 지나자 다소 텁텁한 보이차에 이어 맑은 오룡차를 따르며 스님은 “절에서 맑은 차가 나올 때가 되면 이제 가시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하하.”라고 했다. 속세 같으면 “한 잔 더 하자.”며 소매를 붙들 터인데, 일종의 ‘부드러운 단호함’을 솔직히 보여주었다. 서운하기도 했지만 멋있는 모습이었다. 벌써 출가한 지 20년이 다 된 친구 스님은 다리가 불편해도 시종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고 특히 맑은 눈빛 속엔 말없는 가운데 뭔가 깊은 감동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번에도 나는 “어떤 비전을 갖고 스님이 되고자 했는가?”하는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어쩌면 세속적 삶을 사는 내가 초월적 삶을 사는 스님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것인지 모른다. 오히려 나 스스로 “어떤 비전으로 삶을 사는가?”란 화두를 늘 던지는 것이 더 바람직한지 모르겠다. 친구 스님이 늘 건강하길 두 손 모아 빈다.***
  

         강수돌(고려대 교수, 조치원 신안1리 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