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는 아닐진데...
기숙사는 아닐진데...
  • 벧엘의 집 원용철 목사
  • 승인 2011.06.08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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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용철 목사
벧엘의집 남성 노숙인 쉼터인 울안공동체가 삼성동의 여인숙 같은 곳에서 정동의 호텔 같은 곳으로 이전을 했다. 진짜로 쉼터 시설이 호텔같이 호화스러워졌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하는 것은 새로운 곳이 이전의 공간에 비교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이전하기 전의 공간인 삼성동은 달랑 방이 2개, 거실까지 합해서 3개의 방에 40여명이 생활했기에 때론 칼잠을 자야 할 정도였다. 주방도 비좁아 둘이 서서 설거지를 할 수 없을 정도였고, 화장실도 달랑 한 개뿐이어서 아무리 용변이 급해도 기다려야 했으며, 세면장도 두 사람이 들어가서 씻기에는 비좁은 공간이었다.

또한 일반 건물 2층과 지하를 임대해서 쉼터와 프로그램실로 꾸민 곳이어서 옥상 공간도 우리 맘대로 쓸 수 없었다. 그래서 편히 쉴만한 휴게공간도 따로 없어 건물 앞 도로변에 나와서 담소를 나누거나 앉아 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5층짜리 건물을 1층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공간을 쓰기에 옥상 공간도 우리가 쓸 수 있어(다행히 옥상도 두 개나 되어 한쪽은 텃밭으로 꾸미고 다른 한 쪽은 휴게 공간으로 꾸몄다.) 휴게공간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방이 총 13개나 된다는 것이다.

이전 공간에서는 한 방에 15명 내외가 함께 생활하다보니 여간 불편한 점이 많은 것이 아니었는데 이곳은 한 방에 서너 명씩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지내니 호텔 같지 않으랴. 화장실도 각 층마다 남녀 따로 사용할 수 있도록 충분히 마련되어 있고, 식당도 한꺼번에 50명이 식사를 해도 충분할 정도로 넓고, 세면장도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씻을 수 있을 정도이다.

비록 아파트나 호텔처럼 편의시설이 완벽하지는 않아도 울안공동체 식구들에게는 오성급 호텔이나 다를 것이 없기에 삶의 질도 이전보다는 훨씬 나아진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나만의 생각은 아닌 듯싶다. 각자 자기 공간에 대한 애착으로 방을 꾸미고, 자신의 일처럼 달려들어 옥상 휴게공간을 꾸미고, 쓸고 닦으며 공간에 대한 애착을 보인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삼성동은 비록 공간은 좁고 불편했지만 서로 부대끼며 살다보니 가족적인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식사 시간이며,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것이며, 청소며, 모든 것이 함께 이루어졌고 비록 서로 살아온 과거는 달라도 울안공동체에서 생활하면서는 싫든 좋든 서로를 알아가는 등 소통이 잘 일어났다. 하지만 새로운 공간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만 닫아 버리면 외부와 단절된다. 그래서 신경을 쓰지 않으면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 없다. 식사도 따로 마련된 식당에서 개인 식판을 통해 음식을 담아가면 그만이다. 한 상에 둘러 먹는다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진 것이다.

애써 지켜온 공동체성이 사라졌다. 기껏해야 같은 방에서 생활하는 식구들의 일상에만 관심하지 다른 방에 생활하는 식구들에게는 전혀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합숙소나 기숙사가 되어 버렸다.

최소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되는 것이고 자신의 생활에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한다. 애써 가꾸어 온 공동체에 대한 희망이 생활공간이 넓어지고 쾌적해 지면서 사라진 것이다.

벧엘의집은 공동체를 꿈꾸며 창립되어 지금까지 실현가능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실험들을 계속하고 있다. 울안공동체는 일반적인 홈리스 쉼터의 개념을 넘어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생활공동체를 꿈꾸며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실험하고 있다. 그래서 쉼터의 이름도 울안공동체라고 한 것이다. 대부분의 쉼터가 무슨 집이라고 부를 때 구지 무슨 공동체라고 한 것도 다 이런 기대 때문이었다.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만이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시장경제를 넘어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가난은 생활만 고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자체를 병들게 한다.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더욱 경쟁에 익숙해져 있어 함께 나누기 보다는 우선 자기 것을 챙기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또한 스스로 책임을 지기 보다는 무엇이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한다. 무엇보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기에 되는대로 살아가려는 경향성이 강하다. 그래서 우선 무너진 자신감을 회복하고, 서로 경쟁하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고, 비록 작은 것이라도 자기 것을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찾아 모두가 같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 기업인 야베스공동체를 통해서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같이 일하고, 같이 필요에 따라 나눌 수 있는 생산 공동체를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혼자 열 걸음이 아닌 열이 한 걸음씩”이라는 창립정신대로 경쟁과 서열로 점철된 사회에 거꾸로 사는 길도 있음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바로 벧엘의 이념이요, 방향이다. 그러기에 이런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외적인 틀도 중요하지만 함께 참여하는 식구들의 내적인 변화도 중요하다. 대부분 가난을 경험한 사람들은 작은 이익에 민감하고, 자기밖에 모른다. 이런 사람들에게 울안공동체를 통해 함께 살기 위해서는 먼저 양보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하고, 동료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함을 훈련하자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는 가족공동체를 회복하고, 일터에서 같이 일하고 같이 나누는 초대교회 공동체를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가치가 무너지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의 이런 혼란이 벧엘의 가치를 세워나가기 위한 성장통이길 바란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고나 할까? 지금까지는 외적인 것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가족적인 환경이 만들어졌다면 이제는 스스로 함께 사는 가족임을 고백하고 만들어가는 자발적인 가족공동체의 과정에서 잠시 거쳐야 하는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다. 그러기에 벧엘의 꿈은 오늘도 현재 진행형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울안공동체가 기숙사는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