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그늘 아래서
산그늘 아래서
  • 육복수/시인
  • 승인 2007.10.22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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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저녁으로는 벌써 입김이 허옇게 나온다. 언제였냐는 듯 여름이 가버리고 몸이 햇볕을 반기는 고즈늑한 가을 날, 아내와 둘이서 겨우살이 준비를 한다.

끝물인 고추를 따내서 항아리에 넣고 소금물을 부어서 삭히고, 토란을 캐내고 줄기의 껍질을 벗겨서 햇볕에 널어놓고, 가지는 길게 잘라서 말리고, 언덕에 이리저리 흩어져 숨어있는 호박을 찾아내 씨를 발겨내고, 중간중간 막걸리를 한 사발씩 마시며 신세타령도 한다. 아니 남들은 단풍놀이니 무슨 축제니하면서 좋은 경치 맛난 음식들 찾아다니며 재미있게 사는 것 같은데, 우리는 이 좋은 가을 날, 먹으면 얼마나 먹고 살면 얼마나 산다고 이렇게 일만 하냐고, 우리도 좀 놀러도 다니고 맛난 것 찾아다니며 먹기도 하며 그렇게 살자고 푸념을 늘어놓을라 치면, 아내는 비실비실 웃으며 듣고 있다가, 이 양반아 산에서 살면서 무슨 단풍놀이고, 남들은 웰빙웰빙 하면서 일부러 험한 음식 산에서 나는 음식 무공해 음식 돈들여 시간들여 찾아다니며 힘들게 먹고 마시는데, 우리는 널려 있는게 무공해 음식이고 산에 가면 웰빙식들이 얼마나 많냐며 배부른 소리 하지말라고 복받은 줄 알라며 오히려 핀잔이다.

괜히 이야기 꺼냈다가 본전도 못찾고 옆에서 쭐레거리는 머루녀석에게 눈을 부라리며 웨웨 손을 저어 위협을 했더니 저만큼 가서는 왕왕 짖어대고, 오후 햇발이 나른한 것이 졸립다. 그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내의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산고양이나 새들과 신경전을 벌이는 우리집 강아지 짖는 소리와, 무엇에 놀란 듯 갑자기 푸드득거리는 꿩소리, 사알랑대는 가을바람이 전부인 조용하다 못해 고요한 집에, 산밤, 버섯, 감, 도토리 등 산에만 가면 있는 좋은 음식들, 곁에 있어서 좋은 것인지를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이 맞겠다. 살아가는 일에 오답은 있어도 무슨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선택한 방식에 대한 오류를 줄이며 살아가는 것, 그러나 가끔은 단조로운 생활에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세상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고요히 고요히 살아가는 것, 이것이 아내와의 약속이였었지.

한고랑 남은 고구마만 캐면 오늘일은 마무리다. 고랑 끝으로 산들이 낮게낮게 엎드려 다가오네, 나 보라는 듯이.....

- 칠성판에 대한 단상 -

일곱 구멍과 아홉 구멍 사이
남은 두 개의 구멍이
밀착을 저지하며 부릅뜨고
어제도 오늘도
노래한다 술먹고

볼 장 다 본 사내 하나가
일곱 구멍 속으로
남은 두 개의 구멍을
쑤셔넣고 있다

왜안들어가는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