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보이지 않는 어머니 봉양
눈이 보이지 않는 어머니 봉양
  • 제미영 기자
  • 승인 2011.05.13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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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이복 정려비각(孝子 李福 旌閭碑閣)

효자 이복 정려비각(孝子 李福 旌閭碑閣)은 고려시대 향리인 이복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고려 말엽에 세워진 것으로 공주대교를 건너 시내로 들어오다 보면 도로 왼쪽에 옥룡동사무소 뒤편 언덕에 위치해 있다.

본래는 옥룡동 비선거리(현 충남역사박물관 주차장 오른쪽 아랫마을)도로 가에 방치되어 있었던 것을 1978년 효를 선양한다는 취지아래 이치하 씨를 발기인으로 하여 옥룡동 노인회를 중심으로 현재의 위치에 새로운 행적비를 건립하고 이듬해인 1979년에 비각을 지었다.

▲ 옥룡동사무소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효자 이복 정려비각

이복은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어머니가 눈이 보이지 않아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남의 집에 가서 일을 해주고 음식을 얻어다가 어머니를 봉양해야야만 했다.

하루는 읍내의 부잣집에서 일을 해주고 고깃국 한 그릇을 얻었는데 국이 식기 전에 어머니께 드리기 위해 국을 가슴에 품고 부지런히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고개를 오르다가 얼음에 미끄러져 그만 국을 엎지르고 그 지리에 엎드려 큰 소리로 울었다.

그 후 사람들은 효자가 국을 엎지른 고개라 하여 이 고개를 '국고개'라고 하였으며 고갯마루의 마을을 갱경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갱경골은 현재 중동 국고개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천주교 성당과 국민은행 등이 자리 잡고 있다.

'공주의 맥'에는 위의 내용 이외에도 이복이 장성한 후의 일화까지 매우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복은 성장하여 관원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성실히 일하여 동료와 백성들에게 신망이 두터웠으나 수령에게만은 몹시 미움을 받았다

이는 수령이 자기에게 인덕이 없다고 한탄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에게 아부를 잘하는 간사한 인물만을 가까이하고 바른 말 잘하는 사람은 멀리하기 때문이다.

이런 수령이 동료와 백성들에게 신뢰받고 자기에게 바른 말 잘하는 이복을 곱게 봐줄 리가 만무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복의 약점을 캐내기 위해 사사건건 그를 감시했으며 이복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비위에 거스르는 얘기를 들으면 괜히 다른 일들을 트집 잡아 화를 내고 꾸짖었다.

그리하여 끝내 이복은 수령으로부터 파직을 당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어머니마저 병을 얻어 몸져눕고 말았다. 의원이 말하기를 "잉어의 피를 먹으면 병이 낫는다"고 하였으나 때가 엄동설한인지라 도저히 잉어를 구할 길이 없었다. 그래도 이복은 어머니를 살려야겠다는 일념으로 잉어를 잡기 위해 꽁꽁 언 연못을 깨고 낚싯대를 드리웠다. 짧은 겨울해가 기울도록 잉어가 잡히지 않자 다급해진 이복이 천지신명께 빌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적처럼 구멍에서 잉어 한 마리가 튀어 나오는 것이었다. 이복이 그것을 잡아다가 어머니께 드리자 병이 완쾌되었다고 한다.

▲ 효자문에 대한 내용이 설명되어 있다.

한편, 공주 수령의 비행이 더욱 심해지자 그 사실이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왕이 직접 어사를 파견하여 그 비행을 조사하게 하였지만 수령은 그 어사마저 매수하여 조정의 책망을 모면하였다, 그러나 끊임없는 백성들의 원성 속에서 수령의 비리가 오래 지속될 리 만무하였다, 몇 달 뒤에 강직하기로 이름난 인물이 새로운 어사로 파견되어 오자 수령의 각종 비리가 낱낱이 폭로되어 결국 하직 당하였으며 이복의 억울함과 효성 또한 조정에 알려져 관직이 다시 복직되고 효자비가 내려지게 되었다.

이복은 그 뒤로도 계속 효행과 성실함으로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